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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21. 모딜리아니 - Amedeo Modigli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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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deo Modigliani

 

 

Amedeo Modigliani

 

모딜리아니의 출생과 어린 시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1884년 7월 12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리보르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플라미니오 모딜리아니는 목재와 석탄 교역을 하는 사업가였으며, 어머니 외제니는 유대계 프랑스인으로 문학과 철학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무렵 경기 불황으로 사업이 잘되지 않자 외제니는 단눈치오의 시를 번역하고 가명으로 서평을 써서 가계에 보탰을 정도로 문학과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었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관심과 태도는 어린 모딜리아니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병약했던 어린 시절

 

모딜리아니는 어린 시절부터 늑막염, 폐렴, 장티푸스, 결핵 등을 앓았으며, 평생 병약하게 살았습니다.

 

14세 때 장티푸스를 앓으며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후 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몸이 회복되자 리보르노의 작은 미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 후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그림 수업을 받았는데, 이 역시 질병 때문에 중도에 그만두었다가 다시 시작하곤 했습니다.

 

 

이탈리아 고전 미술에 매료된 모딜리아니

 

요양 차 갔던 로마에서 그는 이탈리아의 고전 미술에 반하게 되었고,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베네치아와 피렌체의 미술관을 돌아다니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고대 미술에 대한 깊은 조예는 후일 그의 작품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인기남 모딜리아니

 

1906년, 파리 몽마르트르에 정착한 그는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인체 데생과 유화를 공부했습니다.

 

당시 파리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중심지로, 마티스, 드랭과 같은 야수파 화가들이 막 활동을 시작했을 때였고, 몽마르트르에는 젊은 화가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예술인 공동체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피카소, 브라크, 브랑쿠시 등 미술사에 한 획을 긋게 될 인물들과 교분을 쌓았으며, 카페, 공연장, 댄스홀 등을 오가며 활기찬 시간을 보냈습니다.

 

늘씬한 몸매, 간결한 멋을 풍기는 옷차림에 위트가 넘치는 미남 모딜리아니는 사교계의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본인만의 화풍을 개발

 

입체파, 야수파, 후기 인상주의 등 다양한 양식의 실험장이었던 파리에서 모딜리아니는 자신만의 화법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특히 후기 인상주의와 폴 세잔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초상화와 누드에 매료되었습니다.

 

또한 아프리카의 미술품, 부족의 가면이나 입상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만큼이나 모딜리아니의 마음을 끌었습니다.

 

그는 브랑쿠시를 통해 조각을 배웠으며, 약 7-8년간 석조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우아한 비례를 갖춘 브랑쿠시의 조각들은 모딜리아니의 예술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타고난 재능과 사교성

 

그는 미술을 배우던 초기부터 인체의 조화와 비례의 미를 중요시했으며, 모델의 특징을 포착하는 데 재능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우아하게 색채를 사용하는 재능도 있었습니다.

 

파리 사교계의 인기 있는 초상화가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한 재능과 사교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초상화를 그리는 대신 독자적인 예술을 추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의 초기작들

 

초기작 <첼로 연주자>, <리보르노의 걸인>, <여인 두상> 등을 보면 그는 이미 섬세한 표현력과 차별화된 색채를 사용하여 몽환적인 한편, 애수가 깃든 분위기를 만들어 낼 줄 알았습니다.

 

<첼로 연주자,1909>

 

 

보는 이의 감성에 호소하는 그의 작품들은 암암리에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작품에 감정이 개입되는 것을 싫어했고 보편성과 객관성을 지향했습니다. 그는 서술성을 배제하고 대상을 양식화하는 방향으로 작품 세계를 발전시켰습니다. 

 

 

회화에의 전념

 

모딜리아니는 1909년부터 조각에 몰두했지만, 1915년 이후에는 회화에만 전념했습니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마 건강이 문제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석고나 진흙으로 주조하는 작업보다 돌에 직접 새기는 방식을 선호했는데, 이는 신체적으로 매우 부담이 컸기 때문입니다. 

 

 

조각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화풍 개발

 

그러나 간결한 선이 중심이 된 추상적 화풍에는 조각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몬드 형태의 눈과 휘어진 커, 긴 목, 아프리카 가면 같은 평면적 얼굴, 단순한 구성과 절제된 색채로 표현된 그의 작품들은 인물의 특징을 잘 드러냄과 동시에 하나의 이미지이자 회화의 아름다움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회화나 미에 대한 어떤 논쟁이나 사조에도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데 몰두했습니다.

 

 

시를 좋아했던 모딜리아니

 

회화든 조각이든 데생이든 그의 작품은 마치 그가 읊는 한 편의 시 같은데, 그는 실제로 시를 무척 사랑했고 작업을 하면서 종종 시를 읊었다고 합니다.

 

단테, 페트라르카, 니체, 보들레르의 글을 좋아했으며, 그의 옆구리에는 늘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가 끼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초상화를 제작한 모딜리아니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군대에 자원했으나 건강 문제로 입대가 거부되자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는 많은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장 콕토, 자크 립시츠 같은 파리 예술계의 친구들을 비롯해 여인들을 주로 그렸고, 그중에는 스쳐 간 애인도 다수 있었습니다.

 

 

장 콕토와의 인연

 

이 시기에 장 콕토와도 불화를 겪었다고는 하나, 모딜리아니와 콕토가 예술과 삶에 같은 견해를 가진 친구였음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장 콕토는 모딜리아니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대부분의 곡선이 매우 가늘고 가벼워서 마치 영혼의 선 같다. 그의 선은 우아함을 상실하는 법이 없다. 그의 데생은 말없는 대화, 그의 머릿속에 있는 선과 우리의 존재 사이의 문답이다." 

 

 

누드화로 논란이 된 개인전

 

갤러리스트 폴 기욤의 도움으로 그는 여러 단체전에 참가하고 작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 갔으며, 1917년에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시회에 걸린 누드화들은 체모가 드러났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었고, 그는 경찰서에 소환되고 전시회는 금지당했습니다.

 

그런 한편 또 다른 후원자는 폴란드 출신 시인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의 재정적인 후원은 이 시기에 그에게 귀중한 보탬이 되었습니다. 

 

 

술, 마약, 니코틴 중독에 시달린 젊은 시절

 

이 무렵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파리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교계 생활을 그만두고 혼자만의 작업을 하면서 자유분방하게 생활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정기적으로 쓰는 편지도 중단했으며, 홀로 파리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렸습니다.

 

자신의 초기작들을 '지나치게 부르주아적'이라며 파괴했으며, 술과 마약, 니코틴 중독에 시달렸습니다.

 

작품이 많은 주목을 받으며 서서히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으나 그는 한 잔 술값을 벌기 위해 뒷골목에서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방탕한 생활은 그가 지병인 결핵으로 오래 살지 못할 거라 절망한 데 기인했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잔느 에뷔테른과의 열정적인 사랑

 

더구나 잔느 에뷔테른과의 격렬한 연애는 모딜리아니로 하여금 더욱 술과 마약에 의존하게 했습니다.

 

그는 1917년 19세의 미술학도 잔느 에뷔테른을 알게 되었는데, 부르주아 가문 출신인 에뷔테른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와 모딜리아니와 동거를 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초상을 그리며 지냈고 곧 딸도 태어났습니다.

 

생활은 궁핍했고, 모딜리아니는 에뷔테른에 대한 사랑과 가장으로서의 의무, 화가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괴로워했습니다.

 

1918년, 모딜리아니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들은 니스로 1년간 요양을 떠났다가 1919년 5월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잔느 에뷔테른,1919>

 

충격적인 모딜리아니와 에뷔테른의 마지막

 

그리고 다음 해 1월 24일 모딜리아니는 결핵성 뇌막염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죽었습니다.

 

에뷔테른은 그가 죽고 이틀 뒤 자신들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로 그 뒤를 따랐습니다.

 

뱃속에는 8개월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파리의 페르 라세즈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10년 후 에뷔테른의 가족들이 그녀를 그의 곁에 안치시켰습니다.

 

모딜리아니의 묘비에는 '이제 바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는데, 극적인 생애와 에뷔테른의 죽음으로 그는 죽은 직후 엄청난 명성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기 1년 전에 그린 에뷔테른의 초상화는 201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2,690만 파운드 (약 458억 원)에 낙찰되었는데, 두 사람이 궁핍 속에서 힘들게 살다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출처-

Amedeo Modigliani  https://mieuxvautartquejamais.com/2018/02/14/383/

<첼로 연주자,1909> https://www.wikiart.org/en/amedeo-modigliani/the-cellist-1909

<잔느 에뷔테른,1919>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medeo_Modigliani_-_Portrait_de_Jeanne_H%C3%A9buterne_%28au_Chapeau%2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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