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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19. 호안 미로 - Joan Mi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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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n Miro 

 

 

Joan Miro

 

 

호안 미로의 출생과 어린 시절

 

호안 미로는 1893년 4월 20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시계공이자 금은 세공인이었는데 조상들이 대대로 타라고나 지방과 마요르카섬에서 목수, 금세공 등 장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런 가문에서 성장한 호안 미로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손재주를 자랑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마요르카섬에 있는 외가를 자주 방문했는데, 이때 곤충, 새, 뱀 등 마요르카의 자연과 동물들을 보며 상상력을 키웠습니다.

 

들판을 돌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리곤 했던 미로는 7세에 지역의 사립학교에서 소묘를 배우며 미술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회계와 상법을 공부 한 미로

 

14세 무렵 바르셀로나의 라론자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배우는 한편, 화가가 꿈인 미로의 의견에 반대한 그의 부모의 뜻에 따라 올리베라스 상업학교에서 회계와 상법을 배웠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고 심각한 실업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미술에 전념하기로 한 미로

 

미로는 17세에 바르셀로나 지역 약국에 취직했으나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커지자 현실과 꿈의 괴리에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2년 만에 일을 그만두고 부모님의 동의를 얻어 프란시스코 갈리의 예술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미술에만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로렌스 아르티가스, 호셉 프란체스크 라폴스 등 예술가들과 교류하였습니다.

 

 

실패로 돌아간 그의 첫 개인전

 

1910년대 미로는 폴 세잔,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로부터 영감을 얻어 인상파와 야수파, 입체파 작품을 작업했으며, 1918년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그림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았고,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작품들이었습니다. 

 

 

1920년에 프랑스 근대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호안 미로는 파리로 이주해 몽파르나스에 살면서 구상적인 풍경화에서 추상 미술로 옮겨가기 시작했는데 파블로 피카소와 친분을 쌓았고 앙드레 마송 등 초현실주의, 다다이스트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시적 몽환 주의와 추상적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특히 그의 작품은 유머러스하고 장난기가 느껴지는 특징이 있는데 <새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작품이 그 시작이 되었습니다.

 

 

파울 클레의 영향

 

1925년에는 파울 클레를 만나 크게 영향을 받았고 네덜란드 화가들과 존 컨스터블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클레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꿈 그림>, <상상 속의 풍경>, 네덜란드 화가 소르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네덜란드의 실내 1> 등에서 그는 자신만의 초현실주의적 화풍으로 재해석하는 동시에 경쾌한 리듬이 담긴 독자적 화풍을 구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미로

 

1930년대에 이런 화풍이 완전히 정착하고 호안 미로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1936년에는 뉴욕에서 전시도 열게 되었습니다. <앉아 있는 여인의 초상>, <소녀의 초상>, <달팽이, 여인, 꽃> 등 작품 속에서 시적 서정성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네덜란드의 실내>

 

<달팽이, 여인, 꽃>

 

<앉아 있는 여인의 초상>

 

 

전쟁으로 인한 고통

 

호안 미로는 고향인 카탈루냐와 파리를 오가며 작업을 했으며 고향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으로 파리로 간 미로는 이런 전쟁 상황에 매우 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인물들>연장, <3부작>, <죽음의 신> 등을 통해 내전의 비극과 그에 대한 자신의 고통을 표현했습니다.

 

이때를 잔인한 시기라 부르며 힘들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미로는 다시 마요르카섬으로 돌아와 파리에서 그리던 그림을 완성합니다. 

 

 

조각 작품 제작

 

1950년대에는 조각 작품들도 제작하게 되는데 친구 아르티가스와 함께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 도예 벽화 <낮>, <밤>을 완성하기도 합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에서 수여하는 국제 대상을 받았습니다.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미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그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높아졌으며, 뉴욕, 파리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리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 나갔습니다. 

 

이 시기 호안 미로는 조각, 도자기, 태피스트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초현실주의의 무의식 영역을 탐구했습니다.

 

 

다양한 작업

 

1964년에는 프랑스 생폴드방스(Saint-Paul-de-Vence)에 마그 재단(Fondation Maeght)의 정원을 장식하는 조각과 도자기 의뢰를 받아 작업하기도 했습니다.

 

1974년에는 공예가 호셉 로요(Josep Royo)와 컬래버레이션하여 뉴욕의 세계 무역센터를 위한 태피스트리 제작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1970년대 후반에 완성한 이 태피스트리는 세계 무역 센터에 전시되어있었으나 2001년 9.11 테러로 작품이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고향에서 마지막 생을 보낸 미로

 

건축가 호세 루이스 세르트는 마요르카섬에 그의 화실을 지어 주었는데 그에 호안 미로는 무척이나 기뻐했다고 합니다.

 

순수하고 소작한 성정의 호안 미로는 1983년 12월 25일 90세의 나이로 팔마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화실에서 작품활동에 몰입하며 평화로운 여생을 보냈습니다. 

 

 

스페인의 화가 호안 미로

 

호안 미로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도예가로, 하나의 파로 규정할 수 없는 그만의 유니크한 작품 세계를 창출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짙고 밝은 색채를 띠고 있으며 추상적인 선과 형태로 이루어져 있어 소박하고 원시적인 느낌이 풍기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훨씬 더 복잡하고 예술적인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가 카쉬는 그를 ‘아이 같은 재치와 유머 감각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그의 성격도, 그의 작품도 소박하고 단순함 속에 리듬감 있고 경쾌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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