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티스트

16. 브랑쿠시 - Constantin Brancusi

반응형

Constantin Brancusi

 

Constantin Brancusi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출생과 어린 시절

 

콘스탄틴 브랑쿠시는 1876년 2월 19일 루마니아 남부 오르데니아 지방의 농촌 마을 호비차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시골 마을이어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으며, 7세 때부터 목동으로 일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산맥을 타고 가축들을 끌고 다니는 한편, 손재주가 뛰어나 일하는 틈틈이 나무를 깎아 장식품을 만들고는 했습니다.

 

13세 때 공업 도시 크라이요바로 홀로 상경해 염색공, 식료품 가게 점원, 술집 종업원 등을 전전하며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바이올린 주인의 후원

 

그러다 술집 손님에게 주변의 물건들을 이용해 바이올린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 손님이 브랑쿠시의 솜씨에 놀라 후원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18세에 드디어 크라이요바 미술 공예학교에 들어가 목공예를 배우는 한편, 독학으로 읽기와 쓰기를 익히며 브랑쿠시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졸업 후 그의 행보

 

1898년 크라이오바 미술 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브랑쿠시는 수도로 거처를 옮겨 부쿠레슈티 미술학교에 입학해 조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곳에서 블레디미르 헤겔에게 사실주의 표현기법을 배웠습니다.

 

그가 학생일 당시 만든 인체표본은 매우 정교하여 의과대학에서 표본용으로 사용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해부학 교수 디미트리에 제로타의 영향으로 해부 실습을 통해 인체의 내부 속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여기서 형태의 단순화, 추상을 통해 본질을 살리는 그의 작품 성향이 성립되게 되었습니다.

 

 

파리로의 이주

 

1904년 브랑쿠시는 조각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파리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파리까지 갈 돈이 없었던 그는 걸어서 파리로 갔는데 가는 도중 빈, 뮌헨 등에 체류하면서 목 세공인으로 일해 경비를 벌고 시계를 파는 등 많은 고생 끝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파리에 간 이유는 오귀스트 로댕 때문이었습니다.

 

로댕의 혁신적인 조각은 전통주의자들에게는 비난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는데, 브랑쿠시는 그 소문을 접하고 직접 눈으로 접하고자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로댕의 작업실에서 일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큰 나무 밑에서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다’면서 연습생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것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예술가로서의 브랑쿠시의 노선

 

파리에서 그는 에꼴 데 보자르에 들어갔으며 밤에는 접시닦이, 술집 종업원 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브랑쿠시는 1906년 학교를 졸업하고 조각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1908년 이후 브랑쿠시는 잠이 든 뮤즈(La Muse endormie,1910)를 발표하면서 국제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입맞춤’을 주제로 여러 작품을 제작했는데,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12년경 대리석으로 제작한 작품입니다.

 

브랑쿠시는 입 맞추는 남녀의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세부적인 부분은 축소하여 간단한 선만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돌의 질감을 살리는 데 집중했으며, 이런 질감과 촉감을 작품의 특징으로 꼽았습니다.

 

1937년에 제작한 <입맞춤의 문>은 그 형상이 더 축소되어 지극히 사실적인 표현에 몰입했던 로댕과는 정반대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손으로 모든 작품을 제작한 브랑쿠시

 

브랑쿠시의 작품들은 모두 그의 손으로 조각되었는데 이 시기의 조각가들은 석고상이나 점토상을 만들면 석공들이 조각하거나 틀을 만들어 그 속에 청동 등의 재료를 부어 제작하는 방식이 보편적이었던 점을 보면 브랑쿠시의 조각들은 표현은 물론 제작 방식 또한 그 당시의 양식과는 완전히 다른 파격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프랑스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호평을 받게 되었고, 여러 전시회에 초대도 받게 됩니다. 

 

 

'새'를 부러워 한 브랑쿠시

 

1910년, 브랑쿠시가 평생을 탐구한 주제인 ‘새’ 조각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 연작을 무려 27점이나 만들었으며 그중 <공간 속의 새>는 16점이나 됩니다.

 

브랑쿠시는 어린 시절 빈곤과 가정불화로 늘 집을 탈출하고 싶어 했고,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며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새는 자유의지이자 비상의 표현이었고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작품은 점점 더 단순화되고 조형성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공간속의 새>

 

웃지 못할 해프닝

 

<공간속의 새> 작품을 미국으로 가지고 오면서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을 두고 세관에서는 이 작품은 새를 묘사한 작품이 아니며 미술품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해 세금을 물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구매한 미국인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세관을 고소했고 세관은 다음과 같은 뼈 있는 질문을 날렸습니다.

 

“당신이 만약 사냥을 하다가 나무 위에 저게 있으면 새라고 생각하고 쐈을 것 같습니까?”

 

이 질문을 들은 에드워드 스타이켄도 당당히 ‘그렇다’라고 대답하지는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대중적인 개념의 조각은 형태가 분명한 모습인데 추상적인 모습의 브랑쿠시의 작품은 새를 나타낸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지만 결국 미국 재판부는 이 조각이 새를 연상하기는 어렵지만 모습이 아름답다는 점과 작가의 의도가 분명한 점을 고려해 예술품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브랑쿠시의 마지막

 

브랑쿠시는 평생 본인의 손으로 조각하는 일에 큰 기쁨을 느꼈으며 조각가로 활동한 30여년간 오직 자신의 작업실에서 고요하고 평화롭게 작품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브랑쿠시의 작업들은 현대 조각, 특히 헨리 무어,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 미국의 미니멀 아트 작가들의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출처-

Constantin Brancusi https://fr.wikipedia.org/wiki/Constantin_Br%C3%A2ncu%C8%99i

<공간 속의 새> https://www.artnexus.com/en/news/5d5c1aedc70855f6b9ef72ef/constantin-brancusi-sculpture-at-moma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