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cis Bacon
프랜시스 베이컨의 출생과 어린 시절
프랜시스 베이컨은 1909년 10월 28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양친 모두 영국인으로 군인이었던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 영국과 아일랜드를 오가며 이사를 자주 다녔고, 천식으로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챌튼엄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이 기간이 정식 교육을 받은 유일한 경험이었습니다.
동성애, 퇴폐적인 향락에 심취한 베이컨
16세 때 아버지에게 동성애적 성향을 들켜 집에서 쫓겨난 후 런던으로 옮겨 이것저것 일을 하며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아버지가 그를 삼촌이 살고 있는 베를린으로 보냈으나 2개월가량 머물며 퇴폐적인 향락에 심취하였습니다.
그는 작품만큼이나 강렬한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한데 화가로서의 엄청난 성공과 함께 문란하고 방탕한 생활, 알코올 중독과 약물 남용 등 극한의 삶을 살았습니다.
피카소 등 거장의 작품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
그러다 파리로 떠나 파블로 피카소, 막스 에른스트 등 거장들의 작품을 보고 다양한 미술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 충격으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베이컨은 20세에 런던으로 돌아와 실내 장식과 가구 디자인으로 돈을 벌며 회화 기법을 배웠으며 작업실을 얻어 그림을 짬짬이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베이컨은 개인전을 열고 잡지 지면에 작품을 발표하는 등 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종종 본인의 작품을 파기하기도 했습니다.
본인의 작품을 파기하는 화가
베이컨이 화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작품 <십자가 책형 Crucifixion>을 그리고 나서였습니다.
검은 배경 속에 십자가에 못 박힌 육체를 단순화 시킨 선과 색으로 채워진 이 그림은 베이컨의 여러 초기작 중 하나지만 그 이후 10년가량 작업한 작품들을 후에 대부분 없애고 10여 점의 작품만 남겨놓아서 그 외의 베이컨의 작품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삼면화로 공식적인 첫 작품을 낸 베이컨
그러던 중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며 베이컨은 심한 천식으로 전쟁을 나갈 수 없게 되어 예술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베이컨은 1945년 런던의 르 페브르 갤러리에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라는 작품을 내놓게 되었는데 이 작품이 그가 화단에 공식적으로 진출한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주로 종교화에서 사용되는 삼면화(트립티크) 형식을 따와 3개의 캔버스로 구성된 3부작으로, 외계인인지 동물인지 상상 속 괴물인지 인간의 모습을 왜곡시킨 것인지 알 수 없는 끔찍한 형체들과 진한 오렌지 계열의 배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한눈에 사로잡히게 될 정도로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알 수 없는 입체적인 공간에 일그러진 육체를 그림으로써 공포와 비명, 분노, 타락 등의 이미지들을 강렬하고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으로 베이컨은 그가 화가로서 작품활동을 이어 나갈 이유를 보여줌과 동시에 작가 본연의 양식을 고수하는 화가임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화가로서의 성공
이 무렵 베이컨은 애인인 에릭 홀의 사진을 이용한 <풍경속의 인물> 등도 제작했고 전쟁을 주제로 한 <회화 1946>를 그렸습니다.
점점 그의 작품에 빠져드는 갤러리스트, 관객이 점차 늘어갔고 작품들이 좋은 반응을 받으며 팔려나가게 되었습니다. 베이컨이 예상치 못한 수익과 예술가로서 성공했다는 자아도취에 빠진 그는 도박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논란의 중심에 선 베이컨
1946년부터 베이컨은 두상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중 <두상 IV>은 17세기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에서 소재를 얻은 작품으로, 이후 전 세계인을 충격에 빠뜨려 명성을 높일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 연구>의 서두가 되는 그림입니다.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 연구>는 1954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와 1962년 유럽 미술관을 돌며 전시하며 대중에게 공개가 되었는데 발표와 동시에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품입니다.
일그러지고 기이하게 녹아내린 듯한 교황의 모습은 극도의 공포감을 자아내며 절규하는 교황의 모습은 두려움과 불안, 압박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교황의 시각적 충격은 각 가톨릭 국가들에 분노를 일으키며 20세기 회화 역사에서 가장 강렬하고 논란을 많이 일으키는 작품을 발표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베이컨은 이후에도 교황의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공통적으로 속박당한 인간의 고통, 권위와 영원, 도덕에 대한 반항을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했습니다.
두 애인의 죽음
또한 베이컨은 자신과 친구들을 비롯해 마약중독자, 동성애자 등 인물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물화 속 인물은 뭉개진 고깃덩어리처럼 비틀어 그려 넣었고 이러한 작품에 대하여 베이컨은 ‘고통받는 인간은 고기다’라고 말했습니다.
베이컨의 애인이었던 에릭 홀이 1959년 죽은 이후 베이컨의 방황은 어느 정도 멈추었으며 피터 레이시와 함께하면서 많은 영감을 받았으나 두 사람은 서로 폭력을 구사하는 등 악몽 같은 애정 관계를 이어가던 중 1962년 피터 레이시가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면서 막이 내렸습니다.
자택에 침입한 도둑에게 반한 베이컨
다음 해 베이컨은 자신의 아파트에 침입한 젊은 청년 조지 다이어에게 빠져들게 됩니다.
도둑질과 소년원, 감옥 등을 오가던 다이어는 베이컨에게 충분한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성공한 예술가인 베이컨은 다이어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위태롭고 불안한 정신 상태의 다이어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받으며 그의 초상화를 즐겨 그렸습니다.
이 무렵 베이컨은 ‘현존하는 영국 최고의 예술가’라고 불릴 만큼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이는 다이어를 끊임없이 절망에 빠뜨렸고 베이컨의 관심을 끌고자 수차례 자살을 기도하다가 결국 약물을 마시고 자살하게 됩니다.
그 일로 베이컨은 큰 충격을 받았으나 이를 <조지 다이어를 기리며>라는 3부작을 그리며 안정을 찾아가게 됩니다.
노년에도 베이컨의 기력은 전혀 쇠하지 않아 여전히 사랑을 하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베이컨의 마지막
1974년, 그는 존 에드워즈라는 영국 청년을 만나 오래도록 만남을 유지했습니다. 베이컨은 죽을 때까지 그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으며 1992년 4월 28일 그가 죽은 후에는 전 재산을 그에게 남겼습니다.
-출처-
<Selfportrait,1971> https://www.centrepompidou.fr/fr/ressources/personne/cajbRpe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 https://theculturetrip.com/europe/united-kingdom/articles/francis-bacon-howling-the-enigma-of-existence/
<회화 1946> 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79204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 프랜시스 베이컨의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 연구> https://www.phaidon.com/agenda/art/articles/2013/february/08/the-truth-behind-francis-bacons-screaming-popes/
<조지 다이어를 기리며> https://www.tate.org.uk/art/artworks/bacon-triptych-august-1972-t03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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