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티스트

29. 르누아르 - Pierre Auguste Renoir

반응형

Pierre Auguste Renoir

 

Pierre Auguste Renoir

 

 

"그림은 충분히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건 인생이나 다른 작품에도 충분히 많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활기 넘치는 파리 시민의 일상생활과 여인, 아이들의 모습을 반짝이는 색채와 빛으로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게 그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화가입니다.

 

 

르누아르의 출생과 어린 시절

 

르누아르는 1841년 2월 25일 프랑스 리모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재봉사였으며, 7남매 중 여섯째였습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소년

 

르누아르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즐겼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즐거워하는 일로 밥벌이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공예가가 될 것을 권유하고, 그가 13세가 되자 도자기 장인에게 맡겼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접시에 그림을 그리는 걸 매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변화

 

그러나 얼마 후 산업혁명으로 대량 생산 기계가 도입되자 도자기 그림 산업은 사양 일로를 걷게 되었고, 그는 술집이나 카페 등지에서 사용하는 방수천이나 부채 등에 그림을 그리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홀로 미술공부를 시작

 

르누아르는 루브르 박물관 옆 골목에 살면서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홀로 그림을 공부했습니다.

 

 

샤를 끌레르 화실 시절

 

화가로서의 욕망에 눈을 뜬 르누아르는 21세 때 에콜 데 보자르 야간부에서 소묘와 해부학 강의를 들었고, 얼마 후 샤를 끌레르의 화실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화실에서 알프레드 시슬레, 클로드 모네, 프레데리크 바지유와 우정을 쌓았고, 새로운 기법과 실험적인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새로운 미술 운동의 시작

 

이때까지 그림은 화실에서 그리는 것으로, 풍경화조차 야외에서 그려 온 스케치를 토대로 실내에서 작업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들은 퐁텐블로 숲 등지로 화구를 들고 다니며 자연을 직업 보고 그리는 한편, 자신들이 가진 미술에 대한 견해를 주고받았습니다.

 

바야흐로 새로운 미술 운동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살롱전 출품

 

1865년, 르누아르는 <윌리엄 시슬레의 초상>으로 살롱전에서 입상했으나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해 프랑스 화단은 모네의 풍경화와 마네의 <올랭피아>로 떠들썩했기 때문입니다.

 

 

리즈 트레오와의 만남

 

이 무렵 르누아르는 리즈 트레오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르누아르가 가장 좋아하는 모델로, 르누아르는 1868년 그녀를 그린 <양산을 쓴 리즈>로 살롱전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양산을 쓴 리즈>

 

 

또한 리즈를 모델로 한 1869년 작 <여름>과 1870년 작 <목욕하는 여인>, <알제의 여인> 역시 살롱전에서 입상했습니다.

 

 

비평가들의 혹독한 비판

 

살롱전에서 두어 차례 입선했지만 다채로운 붓놀림으로 다양한 빛의 효과를 표현한 르누아르와 동료들의 그림은 전통적인 규범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평가들은 이들의 그림을 비꼬았고, 그림을 팔기가 어려워지면서 생활도 어려워졌습니다.

 

또한 살롱전에서 수차례 낙선하면서 자신들만의 전시회를 조직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소시에테 아노님의 결성 

 

1873년 말, 르누아르와 젊은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들은 소시에테 아노님 (무명 미술가 협회)을 결성하고 이듬해 초에 작은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 전시회는 르누아르, 모네, 피사로, 시슬레, 베르트 모리조, 세잔 등의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그리고 한 비평가로부터 이 전시회에 걸린 모네의 <인상, 해돋이>에 빗댄 '인상파'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인상파 전시회

 

인상파 전시회는 1874년부터 1888년까지 8차례 열렸습니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인상파 화가들과 다소 관심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초기 세 번의 전시회는 작품을 출품했으나 1877년 이후부터는 출품하지 않았습니다.

 

 

풍경보다는 인체에 관심이 많았던 르누아르

 

1880년대 인상주의 운동이 방향을 상실하면서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자들에게 완전히 실망하여 거리를 두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풍경에 관심이 많던 여타 인상파 화가들과 달리 인체에 더 흥미가 있었습니다.

 

 

초상화 화가

 

인물 화가로 널리 알려진 그는 중상층 계층의 초상화를 그려 먹고살았으며, 여성과 아이들의 일상 모습과 가족을 모델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빛과 색채를 연구한 르누아르

 

그는 야외의 빛이 모델의 살색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으며, 후일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고 소묘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운 채색을 통한 인체의 유연함과 입체감 묘사에 매료되었습니다.

 

 

에밀 졸라의 코멘트

 

동시대의 소설가 에밀 졸라는

 

"르누아르는 무엇보다 사람을 그리는 화가이다. 그의 주 무기는 놀랍도록 이 색조에서 저 색조로 변화시켜 가는 색조의 명쾌한 저울질에 있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미술 평론가 테오도르 뒤레의 코멘트

 

미술 평론가 데오도르 뒤레는 

 

"르누아르는 빛과 속도감 있는 붓질로 여인에게 유순함과 편안함을 더해 주고, 여인의 피부를 투명하게, 뺨과 입술을 장밋빛 욕정으로 채색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생활고에도 꾸준한 작품 활동

 

1870년대에 르누아르는 물감을 살 돈조차 없다고 하소연할 만큼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꾸준히 작업을 계속하여 기교면에서 점점 완숙해졌습니다.

 

걸작 <객석>, <물랭 드 라 갈레트>, <뱃놀이에서의 점심>,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의 초상> 등이 이 시기에 탄생했습니다.

 

 

<객석>

 

<물랭 드 라 갈레트>

 

샤르팡티에 부인의 후원

 

1879년에는 부르주아이자 예술가들의 후원자였던 샤르팔티에 부인과 아이들을 그린 초상화가 살롱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녀의 후원으로 개인전도 열었습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르누아르는 큰 명성을 얻었고, 프루스트는 "티치아노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에 비견될 만한 감미로운 그림"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여행에서 영감을 얻은 르누아르

 

1881년과 1882년에는 알제리, 이탈리아, 프로방스 지방을 여행했습니다.

 

특히 알제리에서 그는 "이곳에서 나는 흰색을 재발견했다."라고 할 만큼 큰 영향을 받고, 색채를 표현하기 위해 다시 다양한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기교의 정점

 

베네치아와 로마, 폼페이 등지에서 라파엘로와 티치아노의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고 다시 고전에 대해 탐구했습니다.

 

형태는 한결 뚜렷해지고, 붓질은 부드러워졌으며, 빛은 강하면서도 고르게 비추고, 구성과 색채는 단순하면서도 장식적인 균형감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탐구의 결과는 <목욕하는 여인들>, <와르주몰에서 아이들의 오후>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정부의 인정

 

1889년, 르누아르 작품이 파리 세계박람회의 일환으로 열린 '프랑스 미술 100년 전'의 전시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또한 1892년에는 정부의 청탁으로 <피아노 앞의 소녀들>을 비롯한 6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피아노 앞의 소녀들>

 

정부의 공식 인정을 받은 화가가 된 것입니다.

 

 

명성과 부를 얻은 르누아르

 

화랑 뒤랑 뤼엘이 연 개인전도 큰 성공을 거두면서 그는 어느 때보다 높은 명성과 함께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건강의 적신호

 

얼마 후 그는 자전거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고, 이 후유증인지 류머티즘 발작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통징이 극심해지는 겨울이 되면 그는 따뜻한 남프랑스 지역으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결국 1898년에 그는 니스의 작은 마을에서 안식처를 찾았고, 1907년 레콜레트에 땅을 사들여 완전히 정착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린 르누아르

 

1910년경에 이르러 르누아르는 완전히 걷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아 그림을 그릴 수 없었음에도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는 얇은 캔버스를 손바닥에 놓고 곱아 버린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워 그림을 그렸습니다.

 

죽기 전에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보낸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라고 즐겁게 회상했다고 합니다.

 

 

밝고 따뜻했던 르누아르

 

이런 고난에도 그는 여전히 인생에 대한 밝고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내와 아이들, 하녀 가브리엘이 따다 준 꽃들도 정물화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또한 조수를 기용해 대신 조각을 하게 했습니다.

 

르누아르는 프랑스 화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1919년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특별전이 열렸습니다.

 

 

르누아르의 마지막

 

1919년 12월 3일, 르누아르는 폐병으로 레콜레트에서 죽었습니다.

 

숨지기 직전 노 화가는 아들 장에게 꽃을 그리고 싶으니 붓을 가져다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이걸 좀 이해하기 시작했어."라고 중얼거리며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출처-

Pierre Auguste Renoir https://fr.wikipedia.org/wiki/Auguste_Renoir

<양산을 쓴 리즈> https://fr.wikipedia.org/wiki/Lise_%C3%A0_l%27ombrelle#/media/Fichier:Lise_with_a_Parasol.jpg

<물랭 드 라 갈레트> https://en.wikipedia.org/wiki/Bal_du_moulin_de_la_Galette

<객석> https://en.wikipedia.org/wiki/Pierre-Auguste_Renoir#/media/File:Pierre-Auguste_Renoir_023.jpg

<피아노 앞의 소녀들> https://en.wikipedia.org/wiki/Pierre-Auguste_Renoir#/media/File:Auguste_Renoir_-_Young_Girls_at_the_Piano_-_Google_Art_Project.jpg

 

 

 

 

 

 

 

 

 

 

 

 

 

 

 

 

 

 

 

반응형

'아티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31. 드가 - Edgar De Gas  (0) 2023.01.04
30. 로댕 - François Auguste René Rodin  (0) 2023.01.03
28. 무하 - Alfons Mucha  (0) 2023.01.01
27. 로트레크 - Henri de Toulouse Lautrec  (0) 2023.01.01
26. 스티글리츠 - Alfred Stieglitz  (0) 2022.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