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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27. 로트레크 - Henri de Toulouse Lautr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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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de Toulouse Lautrec

 

Henri de Toulouse Lautrec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어린 시절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는 1864년 11월 24일 프랑스 남서부 지방인 알비의 보스크성에서 태어났습니다. 

 

툴루즈 백작 가문과 로트레크 자작 가문의 후손으로, 아버지 알퐁스와 어머니 아델은 사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병약했던 로트레크는 13세 때 의자에서 떨어져 골절상을 입고 불구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냥을 좋아하고 귀족적 자부심이 넘쳤던 아버지의 외면을 받았습니다.

 

 

선천적으로 약한 몸

 

가벼운 골절상이었으나 불구가 된 것은 선천적으로 뼈가 약했기 때문이며, 이는 근친결혼의 영향이라고 합니다.

 

불구가 된 데다 몸이 회복되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는 영지인 보스크 성 안에 틀어박혀 있거나, 나르본 근처의 셀레이랑, 바레주, 라말로 등의 온천지로 요양을 다니며 자랐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로트레크

 

그는 7세 때부터 데생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침낭에 누워 있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림에 더욱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이때 아버지의 친구이자 화가였던 르네 프랭스토가 그의 데생을 보고 그림을 가르쳐 주었고, 어머니와 삼촌이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후원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한 로트레크

 

그는 어린 시절에는 병약해 야외 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좀 자라서는 불구가 되어, 커서는 조잡한 스케치나 그리는 화가가 되어 귀족의 위신을 깎아내린다고 아버지의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런 그를 감싸 주고 화가로 성장하는 데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은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이주

 

1882년,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고자 파리로 간 로트레크는 레옹 보나의 화실에 수습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등 아카데미의 규칙에서 벗어난 그림을 비판하던 보나는 역시 아카데미적 양식으로 그리지 않는 로트레크의 그림을 가차 없이 비판했습니다.

 

 

교수로서의 시작

 

이듬해 보나가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로 임명되면서 화실 문을 닫자 로트레크는 페르날 코르몽의 화실로 옮겼습니다.

 

로트레크는 보나의 차가운 비난에도 그를 매우 존경한 것으로 보입니다.

 

코르몽은 보나보다 친절한 선생으로 그를 인정하고 독려했지만, 후에 로트레크는 삼촌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코르몽은 매우 친절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옛 스승의 채찍질을 저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고 저는 전력을 쏟았습니다."

 

 

코르몽의 화실

 

그렇지만 반 고흐, 에밀 베르나르 같은 신진 화가들이 모여드는 코르몽의 화실은 로트레크가 자신만의 개성적인 양식을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일본 판화도 그의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에게 영감을 준 몽마르트르

 

1885년, 로트레크는 몽마르트르의 아파트에 자리 잡고 홀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카페와 술집, 뮤직홀, 카바레가 즐비하고, 수많은 연예인과 화가들이 드나드는 몽마르트르에서의 생활은 로트레크를 사로잡았습니다.

 

 

서서히 명성을 얻기 시작한 로트레크

 

그는 밤마다 카바레와 카페, 술집에서 수많은 크로키를 그렸고, 집으로 돌아와 캔버스에 옮겼습니다.

 

카바레 미를리통의 소유자이자 작곡가 브뤼앙은 그의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고 잡지 <르 미를리통> 표지로 썼고, 로트레크는 서서히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

 

로트레크는 유화를 사용한 이젤화, 즉 순수 예술을 거부하고 포스터와 삽화에서 폭넓은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무대 예술에 빠진 그는 배우들의 얼굴과 자세를 그로테스크하게 뒤틀거나 특정 부분을 강조하는 무대 조명의 효과를 파악하고 이를 작품에 적용했습니다.

 

 

그 만의 화풍

 

명확하고 표현적인 윤곽선, 뚜렷한 붓질로 다양하게 물감을 칠한 채색 기법과 거친 점묘법, 대담한 이미지 사용, 단순해 보이는 양식 등으로 그는 일물의 동작을 보다 생생하고 감각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런 그의 작품들은 종종 후일의 아르누보 양식과 비견되곤 합니다.

 

 

물랭 루주의 오픈

 

1889년, 벨 에포크(Belle Epoque, 19세기말부터 1914년까지의 시기로, 유럽의 오랜 평화를 바탕으로 문화, 기술, 과학 등이 발전하고 진보적, 낭만적 정신이 움텄습니다.)를 대표하는 카바레 물랭 루주가 문을 열었고, 로트레크는 이곳에서 수많은 그의 뮤즈를 만났습니다.

 

무용수, 매춘부, 배우, 서커스 광대들은 그에게 수많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로트레크의 뮤즈

 

특히 서커스 단원이었던 무희 라 굴뤼의 캉캉에 매료된 로트레크는 라 굴뤼의 유화, 포스터, 석판화를 많이 제작했고, 이는 그의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라 굴뤼가 등장하는 물랭 루주 광고 포스터는 최초의 현대적인 포스터이자 독자적인 예술품으로서 포스터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예술품으로서의 포스터

 

그가 그린 물랭 루즈 포스터는 파리 전역에 배포되었고, 대중은 물론, 예술 애호가들조차 그의 포스터를 수집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켰습니다.

 

1891년, <자르댕 드 파리의 잔 아브릴> 석판화 포스터로 포스터 작가로서의 명성을 확립했습니다.

 

<자르댕 드 파리의 잔 아브릴>

 

로트레크가 사랑한 여성 뮤즈들

 

로트레크의 세계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여성입니다.

 

물랭 루주의 무희 잔 아브릴, 여배우 이베트 길베르 등이 로트레크의 대표적인 모델들로, 로트레크는 그녀들을 쫒아다니며 차를 마시고 저녁이면 코메디 프랑세즈, 짐나즈, 보드빌 등에서 연극을 보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인간적인 그의 그림

 

그가 그린 여성들은 대개 사회 최하층이었으나 그의 그림 속에서 재능과 관능, 고결함을 담은 여성으로 재탄생되었습니다.

 

대표작 <물랭 가의 살롱>은 매춘부 여성들이 쉬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그는 매춘부들의 몸짓이나 관능미보다 그녀들이 지닌 보편적인 고독감을 표현하며 매춘부가 아닌 '인간적인 존재'로 그려 냈습니다.

 

<물랭 가의 살롱>

 

인기남 로트레크

 

여성들은 정력적이고 재기 넘치며 인기 있는 화가였던 그를 숭배했고, 기꺼이 모델을 섰으며, 때로는 정부가 되었습니다.

 

로트레크는 수없이 여자를 갈아치우며 그녀들을 그렸습니다.

 

 

석판화집의 제작

 

그림 작업은 때로는 그의 아파트에서, 때로는 자주 드나들던 카페 콩세르에서, 때로는 물랭 루즈의 매음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매음굴이 집보다 편하다고 말하며, 이곳을 경시하는 인물들을 조롱하고, 외설적이라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춘부를 소재로 한 석판화집을 만드는 데 열정을 쏟았습니다.

 

 

동시대 미술에 큰 영향을 준 로트레크

 

로트레크는 그와 동시대를 산 후기 인상파 화가들과 달리 화가로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들이 현대 미술과 쇼비즈니스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습니다.

 

그는 석판화와 포스터를 주요 미술 형식으로 만들었으며, 일러스트레이션의 발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육체적 결함으로 인한 혐오에 시달린 로트레크

 

1890년대 후반부터 로트레크는 과도한 음주와 정신 착란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쇠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머 감각이 풍부하고, 짓궂은 장난꾸러기였으며, 종종 자기를 희화의 대상으로 삼을 만큼 유쾌한 남성이었지만, 자신의 육체적인 결함에 대한 근본적인 혐오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정신 착란

 

이 무렵 그는 (칵테일 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농담을 들을 정도로) 끊임없이 술을 마시고 울음이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키득댔습니다.

 

1897년경에는 정신착란 증세가 악화되어 환상 속의 거미를 향해 총을 쏘거나 경찰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며 두려움에 떨기도 했습니다.

 

 

요양소 수용

 

1899년, 결국 뇌일리의 요양소에 수용되었고, 자신이 정상임을 입증하여 병원에서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소재는 기억 속에 있는 서커스나 연극 장면들이었습니다.

 

얼마 후 파리로 돌아와 다시 작품 활동을 하던 그는 말 타는 기수의 모습을 그린 <기수>를 제작하고, 잔 아브릴의 모습을 담은 포스터를 디자인했습니다.

 

 

로트레크의 마지막

 

1900년 봄, 다시 건강이 악화된 그는 이듬해 파리를 떠나 어머니가 있는 말로메 성으로 가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36세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1902년 열린 첫 회고전을 시작으로 잇따라 회고전이 열렸고, 로트레크는 화가로서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1922년, 프랑스 남부 알비에 로트레크 미술관이 개관되었습니다.

 

 

 

 

-출처-

Henri de Toulouse Lautrec https://www.biography.com/artist/henri-de-toulouse-lautrec

<물랭 가의 살롱> https://fr.wikipedia.org/wiki/Salon_de_la_rue_des_Moulins

<자르댕 드 파리의 잔 아브릴> https://fr.m.wikipedia.org/wiki/Fichier:Lautrec_jane_avril_at_the_jardin_de_paris_%28poster%29_189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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