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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25. 파울 클레 - Paul K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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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Klee

 

Paul Klee

 

Paul Klee의 출생과 어린 시절

파울 클레는 1879년 12월 18일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스위스에서 나고 자랐으며, 말년도 보냈으나, 화가로서의 활동기 대부분은 독일에서 보냈습니다.

 

성악가였던 아버지는 베른 국립음악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어머니 역시 슈투트가르트 음악학교 출신으로, 이런 환경 덕분인지 음악에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습니다. 

 

 

다양한 재능을 타고난 클레

7세 때 바이올린 연주를 시작했으며, 11세 때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고 베른 음악협회 회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시와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으며, 상상력이 무척 풍부했다고 합니다. 

 

4세 때는 자신이 낙서한 악마 그림들이 마치 살아나는 듯 보인다며 어머니의 치마폭에 숨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화가를 꿈꾸던 소년

그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가족의 관심 속에 성악, 피아노, 바이올린을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후일 그가 미술을 택했을 때 이는 부모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력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종종 음악을 모티프로 했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짧은 뮌헨 아카데미 시절 

1900년에는 뮌헨 아카데미에 들어가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아카데미적인 화풍 및 소묘만 시키는 학교 방침과 맞지 않았고, 결국 이듬해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이탈리아 여행

그해 그는 친구이자 화가인 헤르만 할러와 2년간 이탈리아를 여행했으며,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고, 신문 및 잡지에 음악회와 연극에 대한 글을 기고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습니다.

 

 

다시 시작한 미술

그런 한편 해부학을 비롯해 다양한 매체의 미술 기법들을 연구하면서 다시 미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수채화, 데생, 판화 등 다양한 작품을 제작했으나, 그는 여전히 음악과 미술, 양쪽에 모두 발을 담그고 있었으며, 음악만큼 미술을 잘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장할 때까지 근대미술 사조를 거의 모르고 있었던 전력은 오히려 그를 누구보다 독창적인 화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피아니스트와의 결혼

 

1905년, 그는 뮌헨 분리파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고, <나무 위의 처녀>, <날개 달린 영웅> 등 10여 점의 판화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1906년에는 부모님의 지인 집에서 열린 실내악 연주회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릴리 슈툼푸와 결혼했습니다.

 

 

충격적으로 다가온 고흐의 작품

 

1911년, 클레는 뮌헨에서 청기사파 화가들인 칸딘스키, 프란트 마르크 등과 교류하면서 입체주의를 접했습니다.

 

이듬해 파리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그는 고흐의 작품을 보고 강렬한 표현과 '별의 연소 때문에 괴로워하는 영혼'을 느끼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튀니지 여행

 

<카이루완의 문 앞에서>

 

1914년에는 튀니지를 여행하면서 색채 표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색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것은 영원토록 나를 사로잡을 것이다."

 

이 여행을 통해 그는 색에 관한 이론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현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데서 탈피해 추상적인 표현 양식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카이루완의 풍경>, <튀니지의 빨갛고 노란 집들>, <카이루완의 문 앞에서>등이 이때의 영향으로 제작된 작품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영향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튀니지 여행에 동행했던 친구이자 화가 아우구스트 마케가 전사했습니다.

 

클레는 전쟁에 관심이 없었으나 마케가 죽으면서 민족주의자로 돌변하는 등 극심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런 한편 <전쟁터에서의 죽음> 등 이와 관련된 작품을 10여 점 정도 그렸습니다.

 

그러나 곧 자신의 변모를 깨닫고 1915년 말부터 전쟁에 관한 그림을 모두 중단하고, 모든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끊었습니다. 

 

 

징집되어 전쟁에 참여한 클레

 

1916년 3월, 그 역시 징집되었으나 전쟁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으며, 전장에서도 줄곧 그림을 그리고 공상을 했습니다. 

 

1919년부터 그는 수채화보다 유화 작품을 더 많이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에는 바우하우스에서 회화 교수로 초청받고 교편을 잡기도 했습니다.

 

 

독특한 그의 화풍

 

클레는 작품 활동 초기부터 당대의 어떤 양식에도 속하지 않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선과 색의 균형을 추구했으며, 상징적이거나 기하학적인 형태를 사용하고, 단일 톤의 색조를 선호했으나 다양하고 섬세하게 색을 표현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균형 잡힌 구성과 조화로운 색채 표현에 더해 자유로운 양식과 환상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주목받았습니다.

 

 

클레의 아동 미술 양식들

 

클레의 가장 유명한 아동 미술 양식들도 1920년대에 완성되었습니다.

 

<검은 왕자>, <인형극장>, <금붕어>등의 작품에서 그는 화면의 독창성뿐만 아니라 기법에 있어서도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소재, 질감등을 믹스한 그의 작품

 

유채와 템페라를 섞어 그리기도 하고, 마분지에 종이를 겹쳐 대고 초크로 바탕을 칠해 작업하거나, 검은 유화물감을 친한 종이를 덮어 드로잉 한 것을 다른 종이에 옮겨 그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자화상 <진줏빛 돼지 선생>에서는 스탠실을 이용해 스프레이식으로 물감을 분사했습니다.

 

<빨강, 노랑, 파랑, 하양, 검정 사각형의 조화>와 같은 순수 추상 작품이나 기하학적 패턴으로 '선'의 탐구에 집중한 <큰길과 샛길>등도 탄생했습니다.

 

 

높은 클레의 명성

 

전쟁과 전후라는 불안한 경제 상황에서도 그의 작품은 많이 팔렸습니다.

 

그는 작품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바우하우스에서 존경받는 교수로 활동했고, 유럽과 이집트를 여행하기도 했습니다.

 

국제적으로 명망이 높아졌으며, 1929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클레의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바우하우스를 떠난 클레

 

클레는 1932년 나치에 의해 바우하우스가 폐쇄되기 1년 전 바우하우스를 떠나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의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1928년, 설립자 그로피우스가 나치의 압력으로 사임하면서 바우하우스는

 

'다양한 세력이 생산적이고 확실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초기의 이념에서 벗어나 관료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고, 클레는 이에 실망했습니다.

 

게다가 바우하우스에서는 강의에 할애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 화가로서 작품 활동을 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데도 압박을 느끼고도 있었습니다.

 

 

나치의 탄압

1933년, 클레는 나치 정부에 의해 작품이 '퇴폐 미술'로 규정당하고 집 수색을 받는 등 탄압을 받았으며, 교수직도 박탈당했습니다.

 

그는 베른으로 돌아가 작품 활동에 몰입했습니다.

 

 

작품 활동에 몰두한 클레

 

1934년에는 219점, 1935년에는 148점이라는 엄청난 수의 작품을 제작했으며, 그해 대규모 전시회도 개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피부경화증을 앓으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그의 엄청난 작업량

 

1937년에는 254점, 1938년에는 489점을 그렸고, 그 이듬해에는 무려 1,254점을 그렸습니다.

 

그림의 규모도 조금씩 커졌으며, 상형문자나 표의문자들을 이용한 새로운 작풍이 등장했습니다.

 

 

다양한 그림의 주제

 

<죽음과 불>

 

전쟁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두려움의 폭발 lll>, <죽음과 불> 같은 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둡고 음울한 작품을 제작하는 동시에 <음악가>, <아름다운 정원사>, <넘치는 활기>와 같이 생에 대한 희망과 쾌활한 어조가 두드러지는 작품도 제작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앙겔루스 노부스>

 

말년에 그는 천사를 많이 그렸는데, 죽던 해 이 그림들을 다시 그리고 <천사, 여전히 추한모습>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1940년 심부전으로 사망했으며, 9천여 점에 이르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아들 펠릭스가 클레의 일기장에 있던 글을 묘비명에 새겨 넣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의 언어만으로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죽은 자와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와도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여느 사람보다 창조의 핵심에 가까워지기는 했으나 아직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출처-

Paul Klee https://fr.wikipedia.org/wiki/Paul_Klee

죽음과 불 https://fr.wikipedia.org/wiki/Paul_Klee

앙겔루스 노부스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ymen119&logNo=221365800267 

카이루완의 문 앞에서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f/Kairuan%2C_vor_dem_Thor%2C_Paul_Klee_%281914%2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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