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go Rivera
디에고 리베라의 출생과 어린 시절
디에고 리베라는 1886년 12월 8일 멕시코 중남부의 광산 도시 과나후아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쌍둥이였는데, 동생은 태어난 지 18개월 만에 죽었습니다.
디에고는 세 살 무렵부터 연필을 쥐고 글씨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교사였던 부모는 아들이 마음껏 낙서하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커다란 빈방을 그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광부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데모크래트>라는 진보 잡지를 발행하는 등 진보적 지식인으로 활발히 활동했으며, 디에고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타난 미술적 재능
디에고가 10세 때 아들의 미술적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그를 멕시코시티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에 입학시켜 미술을 배우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풍경화가 펠릭스 파라와 앵그르의 제자였던 산티아고 레불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디에고가 매료된 스승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
무엇보다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판화공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였습니다.
거리를 누비고 다니던 디에고는 판화 공방에 붙은 르네상스 시대 복제화들과 멕시코인 정서가 배어 나오는 소박하면서도 힘찬 판화에 매료되었습니다.
포사다는 그런 그를 귀여워하면서 작업실을 들락거릴 수 있게 해 주었고, 디에고는 멕시코 민중예술에 대한 포사다의 사상과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10대 시절 디에고
10대 시적에 디에고는 멕시코의 농촌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집, 거리, 교회, 화산, 원주민들을 그렸으며, 박물관과 교회를 오가며 아스텍 문화에 매료되었습니다.
스페인 유학
1907년, 디에고는 베라크루스 주지사 데오도로 데사의 후원으로 스페인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스페인 산 페르난도 아카데미에 들어갔으며, 벨라스케스와 엘 그레코, 고야의 작품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파리에서의 활동
1911년에는 파리로 건너가 신인상파부터 입체파에 이르는 다양한 미술 운동을 접했습니다.
이때 모딜리아니, 피카소 등과 교류했는데, 특히 피카소를 무척 존경하고 큐비즘에 매료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점심을 먹는 선원> 등 150여 점의 입체파적 작품을 그렸습니다.
민중 미술로의 전향
그러나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목도하고
"예술은 세상과 시대와 소통해야 하며, 대중이 더 나은 사회를 구성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라며 지나치게 진보적인 예술, 즉 입체파와 단절했습니다.
그리고 1919년 시케로스와의 만남으로 디에고는 멕시코의 민중 미술에 대한 관점을 확립했습니다.
이탈리아 여행
1921년, 멕시코로 돌아오기 전 그는 이탈리아와 런던 등을 여행했는데, 이탈리아의 14세기 프레스코화 양식과 구도는 그의 벽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멕시코로 귀국한 디에고
귀국 후 그는 정부의 공공 정책으로 시행된 벽화 운동에 참여하여 멕시코시티 국립 예비학교, 차핑고의 국립 농업학교 벽화 등을 그렸습니다.
벽화 운동의 중심에 선 디에고
국립 예비학교에 그린 <창조>는 디에고의 첫 벽화이자 동시에 멕시코 벽화 운동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인디언부터 스페인계 인디언까지 모든 멕시코 인종의 역사와 화합을 그린 작품입니다.
디에고를 비롯해 오로스코, 시케이로스 등이 참여한 멕시코의 벽화 운동은 유럽 회화와 차별화되는 강렬함으로 국제적인 이목을 끌었고, 미국과 유럽의 수많은 미술가와 평론가들이 이들의 벽화를 보기 위해 멕시코를 찾았습니다.
모스크바로 초청 된 디에고
1927년, 디에고는 멕시코 공산단원 자격으로 10월 혁명 10주기 기념행사에 초청받아 모스크바로 갔습니다.
1925년 멕시코를 방문했던 러시아 시인 마야콥스키의 주선이었습니다.
그는 디에고의 벽화들을 러시아에 소개했으며, 디에고는 러시아에서 자신의 높은 인기에 놀랐습니다.
비판적인 러시아의 실상황
미술 학교에서 강연이 쇄도했으며,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스탈린의 독재 체제 아래에서 경직되어 가는 러시아 문화와 정치, 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 외에는 예술로 취급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 때문에 벽화 제작을 하려던 그의 시도는 불발로 끝났습니다.
멕시코시티에서의 벽화 제작
1929년에는 멕시코시티 대통령궁 중앙계단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스페인 정복 이전 아스텍 문화를 바탕으로 한 멕시코의 신화와 역사를 표현한 이 작품은 1935년 완성되었습니다.
프리다 칼로와의 결혼
1929년에는 21살 연하인 화가 프리다 칼로와 결혼했습니다.
그의 세번째 결혼이었습니다.
그는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는데, 결혼 생활 중에도 끊임없이 바람을 피웠으며, 그의 아내였던 여성들은 그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았습니다.
프리다 칼로와의 결혼 생활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심지어 그는 프리다의 여동생과 불륜까지 저질렀습니다.
프리다와도 한 번 이혼을 했다 재결합했으며, 이후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미국에서의 활동
디에고는 1930년 11월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증권거래소 벽화 작업을 의뢰받은 데다 멕시코에서의 벽화 작업이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을 사면서 중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31년 샌프란시스코 증권거래소 벽화, 1932년에 디트로이트 예술원 벽화를 그렸으며, 같은 해 록펠러 센터의 벽화 작업에도 착수했습니다.
크게 지탄받은 그의 작품
그런데 록펠러 센터 작업에서는 사회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는 작품을 제작해 지탄을 받았습니다.
노동자 리더의 얼굴을 레닌으로 표현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작업은 중단되었고, 디에고는 더는 미국에서 활동하기 힘든 상황에 처했습니다.
1933년, 뉴욕의 신 노동자 학교 벽화를 마지막으로 멕시코로 귀국한 그는 이듬해 록펠러 센터에 제작하려던 벽화를 멕시코시티 국립 예술원에 그렸습니다.
30,40년대 멕시코 시티에서의 벽화 작업
1940년대 그는 멕시코시티 대통령궁에 고대 문명을 표현한 프레스코화, 프라도 호텔에 멕시코의 역사를 표현한 벽화 등을 제작했습니다.
1950년대에는 라자 병원에 원시 의학부터 현대 의학에 이르기까지 멕시코 의학의 역사를 집대성해 프레스코와 모자이크 기법으로 벽화를 제작했습니다.
디에고의 마지막
하루에 18시간 이상씩 그림을 그렸으며, 침대 맡에는 늘 스케치북을 놓아두고 있었던 디에고 리베라.
말년에 오른팔의 마비 증상으로 손을 잘 쓰지 못했음에도 계속 그림을 그리던 그는 1957년 자신의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작품을 통해 멕시코의 정체성을 재확립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멕시코 민중을 교화하려던 그는 생전부터 오늘날까지 멕시코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의 시신은 멕시코시티 로툰다 묘지에 시케이로스, 오로스코와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출처-
Diego Rivera https://fr.wikipedia.org/wiki/Diego_Rivera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https://fr.wikipedia.org/wiki/Diego_Rivera
멕시코시티 대통령궁 벽화 1 https://www.fodors.com/world/mexico-and-central-america/mexico/mexico-city/gallery/6-ULTMEX-Palacio-shutterstock_1571927437
멕시코시티 대통령궁 벽화 2 https://www.reddit.com/r/ArtPorn/comments/oreg7w/dream_of_a_sunday_afternoon_in_alameda_park_di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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