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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28. 무하 - Alfons Muc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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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ons Mucha

 

Alfons Mucha

 

 

알폰스 무하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화가로,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아르누보랑 19세기말 20세기 초 서유럽 및 미국에서 유행한 장식 미술 양식으로, 독일에서는 유겐트스틸 (Jugendstil), 프랑스에서는 기마르 양식 (Style Guimard)으로 불렸습니다.

 

알폰스 무하는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장식적인 포스터와 실내장식 등에서 아르누보 유행을 선도하면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회화와 다름없는 예술성을 추구하여 상업의 영역으로 무시받던 실용 미술을 순수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으며, 예술을 일상생활 속으로 끌어들인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Alfons Mucha 의 출생과 어린 시절

무하는 1860년 7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지금의 체코) 모라비아의 작은 마을 이반치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지역 재판소에서 근무했으며, 어머니는 귀족 자제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였습니다.

 

당시 모라비아는 수공업 양식으로 물건을 제작하여 팔고, 도로도 포장되지 않은 중세적인 분위기의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무하는 초등교육을 받았으며, 중등학교 시절에는 성악에 자질을 보여 성 테프로브 수도원 성가대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무하

 

무하는 어린 시절부터 온 집 안을 낙서로 도배할 만큼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의 주선으로 재판소 서기로 근무했으며, 일하는 틈틈이 마을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지방 극단의 무대 배경 등을 그리면서 소일을 했다고 합니다.

 

 

빈으로 옮긴 무하

 

20세 무렵 그는 빈으로 올라와 브루크하르트 공방을 비롯해 미쿨로프의 극장 등에서 무대 장치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미쿨로프 귀족 큐헨 벨라시 백작의 후원을 받게 되었고, 25세 때 벨라시 백작의 동생인 에곤 백작의 도움으로 뮌헨 아카데미에서 종교화와 역사화를 공부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파리로 떠난 무하

 

2년 후 아카데미를 졸업해서는 벨라시 백작의 도움으로 파리 유학을 떠났습니다.

 

파리에서 그는 쥘리앙 아카데미와 콜라로시 아카데미를 다니는 한편, 잡지와 책에 삽화를 그리고 포스터도 작업하기 시작했습니다.

 

 

삽화가로 얻은 명성

 

<지스몽다> 포스터

 

1894년, 무하는 당대 파리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던 여배루우 사라 베르나르 주연의 연극 <지스몽다> 포스터를 그리면서 삽화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무명의 무하가 이런 큰일을 맡은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운이 좋았던 무하

 

모두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나고 텅 빈 파리, 무하는 갈 곳이 없어 인쇄소에서 일을 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르네상스 극장의 매니저가 새해 첫날 공연될 <지스몽다>의 공연 포스터를 그릴 삽화가를 찾았으나 파리에 남아 있는 삽화가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무하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포스터의 예술화

 

포스터는 당시 상업 광고물인 동시에 일러스트레이션으로서 그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툴루즈 로트레크의 포스터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야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보다 선정적이 되었고, 포스터에 표현된 여인들은 대부분 요부의 이미지를 띠고 있었습니다.

 

 

무하의 독특한 스타일

 

그런데 무하는 섬세하고 독특한 선과 색으로 이상화된 여성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정돈된 윤곽선 안에 물결치는 머리와 치맛자락, 화려한 꽃과 식물 덩굴에 둘러싸인 여인은 우아하고 신비로웠습니다.

 

 

센세이셔널한 포스터 데뷔

 

극장 매니저는 무하의 포스터에 난색을 표했으나 사라 베르나르는 크게 만족을 표했고, 새해 첫날 무하가 그린 <지스몽다>의 포스터가 파리 시내에 걸렸습니다.

 

이 포스터는 파리 시민 사이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으며, 연극은 성황리에 끝났습니다.

 

 

사라 베르나르 전속이 된 무하

 

그녀는 이후 6년간 무하에게 자신이 출연하는 연극 포스터를 비롯해 무대 의상, 장신구, 무대 디자인 등을 맡겼습니다.

 

사라를 위해 무하는 <햄릿>, <토스카>, <카멜리아의 여인>, <로렌자치오>, <사마리아의 여인> 등 수많은 포스터와 무대 용품 일체를 디자인했으며, 사라는 누구보다 자신을 아름답게 그려 준 것에 크게 만족했습니다.

 

 

절친한 사이가 된 사라와 무하

 

두 사람은 1901년 사라의 미국 순회공연에 동행할 만큼 친밀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무하는 사라의 개인적인 파티를 위해 <백합의 사라 베르나르>라는 그림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이후 사라의 인터뷰 기사에 쓰인 것은 물론, 각종 엽서와 포스터로 만들어져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화가로서의 명성

 

무하는 이 시기에 사라를 위한 작업 외에도 다양한 회화, 포스터, 삽화를 그렸으며, 보석이나 카펫, 벽지 디자인을 했습니다. 

 

그의 스타일은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추앙받으며 화가로서의 명망까지 얻게 해 주었습니다.

 

 

엄청난 인기를 얻은 그의 작품들

 

<황도십이궁>

 

 

달력으로 만들어져 판매된 <파리스의 심판>과 <황도십이궁>은 주문량이 인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으며, <사계> 연작 장식 패널 역시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4개의 예술>, <하루 4번의 시간>, <4개의 보석> 등 소재를 달리하여 계속 제작되었습니다.

 

또한 다양한 잡지와 단행본 삽화를 제작했으며, 빈 분리파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습니다.

 

 

전시회에 출품한 그의 조각

 

1899년, 무하는 조각을 시작했는데, 이때 제작한 <자연>은 이듬해 파리 만국박람회의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관에 전시되었습니다.

 

또한 만국박람회장에는 아르누보 작가들의 전시장도 있었는데, 이때 무하는 아르누보의 대표 작가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조르주 푸케와의 인연

 

보석세공사 조르주 푸케가 무하의 디자인으로 만든 장신구를 박람회에 출품했는데, 이 역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자 푸케는 루아얄 가에 낸 자신의 상점 인테리어 및 건물 디자인을 무하에게 맡겼습니다.

 

푸케 상점은 아르누보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 꼽힙니다.

 

이후 무하는 세계 각국에서 포스터, 전시관 디자인, 보석 등 수많은 디자인 의뢰를 받았으며, 이듬해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아르누보 그 자체

 

무하의 이름은 곧 아르누보 양식, 그 자체로 통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이런 성공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고, 고향으로 돌아가 보다 진지한 예술에 몰두하고 싶어 했습니다.

 

 

 

마리 히틸로바와의 만남

 

1903년, 무하는 파리로 유학 온 마리 히틸로바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파리에서 성공한 고국의 예술가인 무하를 존경했고, 두 사람은 22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1906년에 결혼했습니다.

 

 

미국에서의 환영

 

1905년, 무하는 미국을 방문했는데, 이때 <뉴욕 데일리 뉴스>는 그에 대한 특집기사를 실으면서 대대적으로 그를 환영했습니다.

 

결혼 후 무하는 미국에 정착해 시카고 미술연구소에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런 한편 여전히 연극 무대 배경과 의상, 포스터를 디자인하고, 전시회도 꾸준히 개최했습니다.

 

 

새로운 후원자 찰스 크레인

 

1909년에는 사업가 찰스 크레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후일 체코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토머스 마사리크와 절친한 사이로, 슬라브 민족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크레인은 고향에 정착하여 슬라브 색채를 띤 예술작품에 전념하고 싶다는 무하의 의지를 이해하고 그를 후원하기로 합니다.

 

 

체코로 돌아온 무하와 그의 가족

무하는 이듬해 가족과 함께 체코로 돌아와 작업실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체코의 역사와 민족애를 담은 <슬라브 서사시>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슬라브 역사의 대변혁기를 단계별로 묘사한 것으로, 총 20점, 제작기간 20여 년에 달하는 기념비적인 대작이었습니다.

 

 

대작의 시작

 

<슬라브 서사시- Slovane v pravlasti>

 

<슬라브 서사시- The&nbsp;Apotheosis&nbsp;of the Slavs >

 

 

<슬라브 민족의 원고향>, <니콜라 즈린스키의 시게트 방위>, <스반토비트 축제>, <그룬발트 전쟁이 끝난 후>, <얀 야모스 코멘스키의 마지막 날>, <성 아토스 산> 등이 대표적으로, 10 작품은 체코의 역사에서, 나머지 10작품은 다른 슬라브 국가의 역사에서 제재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범 게르만주의의 폭력적인 억압에 대한 저항 의식을 담아 슬라브 민족이 여기에서 벗어나 화합을 이루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러는 와중 체코어를 가르치는 사설학교 설립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브르노의 남서 모라비아를 위한 국민연합 복권>, <위협>을 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대작의 완성

 

1919년, <슬라브 서사시> 11점이 프라하에서 공개되었으며, 이듬해 미 전역에서 열린 무하의 회고전에도 전시되었습니다.

 

총 관람객 60만 명에 달하는 전무후무한 전시회였습니다.

 

무하는 1926년에야 <슬라브 서사시>를 모두 완성했습니다.

 

 

고통스러운 그의 인생 말년

 

인생 말년에 들어서 무하는 유행에 뒤처진 낡은 양식과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색채를 지녔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또한 반전사상, 범 게르만주의에 대한 저항 의식을 담은 작품들로 고초를 겪었습니다.

 

 

나치에 체포당한 그의 마지막 생

 

1939년에 나치가 프라하를 점령하자 무하는 체포당해 구금되었으며,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을 마감했습니다.

 

나치는 그의 장례식에 가족만 참석할 것을 명했으나, 10만 명의 인파가 장례식에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출처-

Alfons Mucha https://fr.wikipedia.org/wiki/Alfons_Mucha

<지스몽다> 포스터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2/2f/Alfons_Mucha_-_1894_-_Gismonda.jpg

<황도십이궁> https://fr.m.wikipedia.org/wiki/Alfons_Mucha#/media/Fichier%3ASavonnerie_de_bagnolet_Alfons_Mucha.jpg

<슬라브 서사시-Slovane v pravlasti> https://en.wikipedia.org/wiki/The_Slav_Epic#/media/File:Slovane_v_pravlasti_81x61m.jpg

<슬라브 서사시-The Apotheosis of the Slavs> https://en.wikipedia.org/wiki/The_Slav_Epic#/media/File:Mucha_Apoteoza.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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