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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30. 로댕 - François Auguste René Ro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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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çois Auguste René Rodin

 

Rodin

 

오귀스트 로댕은 근데 조각의 시조로 일컬어지며 미켈란젤로 이후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추앙받았습니다.

 

그는 18세기 이래로 건축물의 장식이자 회화의 종속물에 불과했던 조각을 회화와 같은 수준의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사실주의적, 상징주의적 시법으로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감정들을 표현한 그의 작품은 근대 조각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댕의 출생과 어린 시절

 

로댕은 1840년 11월 12일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경찰국의 하급 관리로, 집안 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에 수도사들이 운영하는 신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으나 읽고 쓰기도 제대로 못하자 부모는 그가 9세 때 보베의 기숙학교로 보내 엄격한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예민하고 소심한 로댕

 

감수성이 예민하고 소극적이었던 그는 병영 같은 학교생활에서 많은 상처를 입었고, 홀로 운동장 구석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견뎠다고 합니다.

 

졸업할 때까지 그는 철자법을 완전히 익히지 못했고 말년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여서, 그의 비서들은 편지 철자들을 고치는 게 주된 업무라며 불평했다고 합니다.

 

 

미술학교 진학

 

그의 아버지는 로댕이 공무원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고, 아들의 고집에 결국 15세 때 '프티 에콜'이라고 불리던 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를 그랑 제콜이라고 부릅니다)에 보냈습니다.

 

이곳에서 로댕은 드로잉과 석고 모형 제작을 배우면서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석조 장식 시작

 

17세 때부터 에콜 데 보자르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탈락했고, 결국 석조 장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틈틈이 주변 인물의 흉상을 제작하면서 조각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그는 평생 고집과 끈기, 불굴의 결단력으로 미술가로서의 길을 개척했습니다.

 

 

로즈 뵈레와의 만남

 

1864년, 그는 <코가 부러진 남자>라는 청동상으로 살롱전에 최초로 출품했으나 탈락했습니다.

 

이 무렵 그는 로즈 뵈레라는 여성을 만났고, 두 사람 사이에 아들도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로댕은 아들에게 자신의 성을 붙여주지 않으면서도 그녀와의 인연을 평생 지속했습니다.

 

 

로즈 뵈레의 감내

초기 작품에는 뵈레를 모델로 한 조각이 여러 점 있는데, 로댕은 그녀를 연인이라기보다 모델로 여겼고, 뵈레는 그 상황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사랑으로 감내했습니다.

 

 

전쟁의 영향

 

1870년, 프랑스 - 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고 로댕도 징집되었으나 약시 때문에 1년 만에 제대했습니다.

 

전쟁으로 일감이 없어 먹고살기 어려웠던지라 그는 파리에 뵈레와 아들을 남겨두고 브뤼셀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카리에 벨뢰즈의 공방에서 일하며 건물 장식을 조각했습니다.

 

 

여행으로 영감을 받은 로댕

 

1875년, 그는 돈을 모아 피렌체, 로마, 나폴리 등을 여행하면서 미켈란젤로와 도나텔로의 조각에 깊은 영향을 받고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살롱전에 <코가 부러진 남자>를 수정하여 출품해 입선했습니다.

 

 

새로운 작품 세계

 

그의 작품 세계가 최초로 발현되기 시작한 것은 1877년 살롱전에 전시된 <청동 시대>입니다.

 

 

<청동 시대>

 

인간의 신체를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이상화된 미가 지배하던 시대에 비평가들을 당혹시켰습니다.

 

아카데미적인 요소도, 자연주의적인 요소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였습니다.

 

 

파리로 돌아온 로댕

 

살아 있는 사람을 방불케 하는 인체 표현으로, 항간에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몸(혹은 시체)을 그대로 주조해 만들었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로댕은 이 전시를 계기로 파리로 돌아왔으나 건축 일을 계속하며 작품을 제작했고, 1879년 파리 시청의 조각상 <설교하는 세례 요한>을 제작하면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청동 시대>가 지닌 사실주의 기법이 재평가되면서 조각가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40세였습니다.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고찰

 

그해 로댕은 건립 예정인 파리 장식 미술관의 청동문 제작을 의뢰받았습니다.

 

로댕은 이때부터 인간의 육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데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단테의 <<신곡>>중 <지옥>을 모티브로 사랑, 고통, 죽음 등으로 몸부림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창조했습니다.

 

사후의 지옥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지옥을 표현한 것입니다.

 

 

로댕의 걸작의 탄생

 

약 200여 점의 환조 혹은 환조와 유사한 형태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지옥문>은 전체는 물론, 하나하나의 조각들이 독립적인 걸작으로 인정받습니다.

 

 

<지옥문>

 

 

그중 가잘 유명한 것은 <생각하는 사람>인데, <아담>, <이브>, <세 망령>, <무릎 꿇은 탕녀>, <달아나는 사랑>, <우골리노와 자식들> 등 다양한 인물들이 지옥의 고통에서 몸부림치는 과정을 문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미완으로 남은 로댕의 작품

 

그는 죽을 때까지 약 20여 년간 이 작품에 매달렸으며, 끝내 미완으로 남기고 죽었습니다.

 

계속해서 구성을 변경하고 인물을 수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곡>>을 읽고 또 읽으며 자신의 작품을 점검했습니다.

 

"나는 <지옥>에 나오는 8개의 원을 그리면서 단테와 꼬박 1년을 살았다. 그런데 그해가 저물 무렵 나의 데생이 현실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다시 작업했다. 자연을 기초로, 모델을 써서 작업했다."

 

 

<칼레의 시민> 기념비 제작

 

1884년, 로댕은 <칼레의 시민> 기념비 제작 공모에 당선되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대립한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347년 에드워드 3세의 군대가 칼레를 점령했을 때의 일을 조각으로 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저항 끝에 칼레가 함락되자 시민들에게 잔인한 조처가 취해질까 우려한 시민 대표 6명이 스스로 목에 밧줄을 감고 에드워드 3세 앞으로 나갔습니다. 이에 감복한 에드워드 3세가 모두 사면해 주면서 칼레 시민들은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독특한 콘셉트의 기념비

 

로댕은 이들의 영웅적인 측면을 강조하기보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조국애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당초 칼레 시청이 의뢰한 것은 석조나 청동 단독상, 혹은 단독 주인공과 서사를 담은 저부조로 꾸미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기념비의 모습이었습니다.

 

 

반대 여론

 

그러나 로댕은 6명의 군상, 그것도 각각 독자성을 띤 작품을 제작하려고 했습니다.

 

이 작품은 당초 시청 앞 광장에 세워질 예정이었으나 영웅적인 면모보다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표현한 점이 문제가 되어 반대 여론에 직면했습니다.

 

결국 한적한 바닷가에 세워진 이 작품은 29년이 지나서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시청 앞 광장으로 옮겨졌습니다.

 

 

높아진 그의 명성

 

로댕의 명성은 점차 높아졌고, 공방은 날이 갈수록 확장되었습니다.

 

 

카미유 클로델과의 만남

 

이에 따라 조수와 제자도 늘어났는데, 그중에는 카미유 클로델도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로댕은 42세, 카미유는 18세였습니다.

 

그녀는 일찍이 재능을 인정받아 <지옥문>과 <칼레의 시민> 제작에 참여했으며,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로댕의 여성 편력

 

로댕은 카미유와 뵈레 사이를 오가는 한편, 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싸우면서 9년간 연인 관계를 유지했고, 1898년 카미유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완전히 파국을 맞았습니다.

 

이 일은 큰 스캔들로 번졌으며, 이 시기 로댕의 작품들은 이를 증폭시키는 데 일조했습니다.

 

<키스>, <불멸의 우상>, <신의 손, 연인>, <죄> 등 사랑과 욕망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이 시기에 제작된 것입니다.

 

 

발자크의 조각상

1891년, 로댕은 프랑스 문학협회의 의뢰로 오노레 드 발자크의 조각상을 제작했습니다.

 

발자크 조각상

 

그는 발자크의 모든 작품과 생애를 연구했고, 7년이나 걸린 끝에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로댕은 "그것은 내 인생의 요약이고, 내 삶 전체의 노력과 시간의 결과물이며, 내 미학적 이론의 주요한 동기이다." 라면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거부된 그의 작품

 

그러나 5미터가 넘는 이 대작은 일반적인 대형 기념상에 대한 기대와 어긋났고, 결국 협회가 이 작품을 거부하면서 로댕의 집에 방치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댕 사루 1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청동으로 주조될 수 있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상

 

1886년, 판테온에 세워질 기념비로 의뢰받은 <빅토르 위고> 상 역시 이와 유사한 충돌을 겪었으며, 1939년에야 청동으로 주조되어 몽마르트르 사거리에 세워졌습니다.

 

 

개인전으로 얻은 국제적인 명성

 

1900년, 로댕은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조각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1908년에는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가 직접 뫼동에 있는 로댕의 작업실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공공 설치물들을 비롯해 흉상 주문이 밀려들었으나 말년에 그는 조각보다는 드로잉에 집중했습니다.

 

 

뵈레와의 일생

 

로댕은 말년에도 뵈레와 아들을 합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일생 자신에게 보여 준 헌신은 잊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여성 편력을 자랑한 그는 '취향도 없다'라는 비아냥을 들을 만큼 각양각색의 여성들과 추문을 뿌렸는데, 뵈레와의 관계는 평생 지속됐으며, 애인들 역시 뵈레가 아내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1916년 뇌졸중을 일으키고 나서야 그녀와의 결혼은 숙고했으며, 같은 해 작품과 전시물을 국가에 기증했습니다.

 

 

 

뵈레와의 결혼과 로댕의 마지막 생

 

그리고 죽기 9달 전인 1917년 2월에 뵈레와 정식으로 결혼했습니다.

 

뵈레는 결혼식을 올린 지 2주 만에 사망했고, 로댕은 그해 11월에 죽었습니다.

 

그가 죽고 2년 후 그가 말년에 거주했던 비롱 관은 로댕 미술관으로 개관했습니다.

 

 

 

 

 

 

 

-출처-

François Auguste René Rodin https://en.wikipedia.org/wiki/Auguste_Rodin

<청동시대> https://en.wikipedia.org/wiki/Auguste_Rodin

<지옥문> https://en.wikipedia.org/wiki/Auguste_Rodin

발자크 조각상 https://fr.wikipedia.org/wiki/Monument_%C3%A0_Balzac_%28Rodin%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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