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gène Delacroix
당대의 비평가 테오필 고티에는 들라크우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라크루아만큼 진정으로 현대적인 회화를 그린 이는 없었다. 이 천재는 사랑, 공포, 광기, 절망, 분노, 열광, 포만, 꿈과 행동, 사고와 우수, 이 모든 것들을 셰익스피어만큼이나 훌륭하게 표현한다."
들라크루아의 출생과 어린 시절
페르디낭 빅토르 외젠 들라크루아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의 대표적인 화가입니다.
1798년 4월 26일 프랑스 샤랑통 - 생모리스에서 외교관 샤를 프랑수와 들라크루아 빅투아르 외벤 사이에서 넷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무성한 소문
그러나 생부가 정치가 탈레랑이라는 소문이 그를 따라다녔으며, 역사사 중에도 탈레랑이 그의 화가 활동을 은밀히 후원해 주었다는 점과 닮은 외모, 샤를 들라크루아의 불임설 등 다양한 근거를 들어 이 소문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들라크루아 본인은 단 한 번도 소문을 믿지 않았고, 아버지를 샤를에 대한 존경심을 평생 품고 살았습니다.
외숙부의 후원
7세 때 아버지를 잃고 누나가 그를 키웠으나 재산 관리가 미흡해 두 사람은 얼마 후 파산했습니다.
그러나 외숙부의 후원으로 생활은 풍족했고, 8세 때 리세 앵페리얼 기숙학교 (오늘날의 루이 르 그랑 리세)에 들어가 인문 교육을 받았습니다.
평생 우정의 시작
이곳에서 그는 펠릭스 기이마르데, 장 바티스트 피에레, 아실 피롱 등과 평생 계속된 우정을 맺었습니다.
그는 일생을 연극, 문학 작품, 고대 역사 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을 이때 쌓은 문학적, 인문학적 소양 덕분이었습니다.
고대 작품을 숭배한 들라크루아
그는 호라티우스와 아우렐리우스 등이 쓴 고대 작품을 숭배했고, 단테, 바이런, 셰익스피어, 몽테뉴 등 철학, 문학, 시, 희곡 등을 가리지 않고 읽었습니다.
제리코와의 인연
16세 때에는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지는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의 스승이었던 피에르 나르시스 게렝 남작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제리코와 인연을 맺은 들라크루아는 <메두사 호의 뗏목>의 모델이 되기도 하고, 제리코를 대신해 작품도 그리면서 제리코에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에콜 데 보자르
18세 때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한 뒤에는 화가 수업을 계속 받는 동시에 사교계에서 스탕달 등의 문인들과 친분을 맺고, 부지런히 연극과 오페라를 관람했습니다.
이런 생활은 그의 작품 소재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살롱전 출품
1822년, 들라크루아는 살롱전에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출품했습니다.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미켈란젤로와 루벤스의 영향이 엿보입니다.
좋은 반응을 받은 그의 작품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명망 있던 화가 프랑수아 제라르는 그에 대해 '천재적인 자질'이 있다고 평했으며, 시인 보들레르는 그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정치가이자 역사가로 후일 프랑스 내무장관이 되는 루이 티에르의 후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낭만주의의 선구자
그리고 1824년 살롱전에 <키오스 섬의 학살>이라는 역사적 주제를 다룬 작품을 출품하면서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떠올랐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화단을 지배하던 고전주의, 특히 앵그르의 작품과 비교되면서 혹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위고와 함께한 영국 여행
1825년, 들라크루아는 빅토르 위고와 함께 영국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과 괴테의 <파우스트> 등의 연극을 보고 큰 인상을 받았으며, 바이런과 윌터 스콧 등의 영국 문학가들에게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영감의 원천
그는 이 시기에 바이런의 희곡 <마리노 팔리에로>에서 영감을 받아 <마리노 팔리에로 총독의 처형>을, 윌터 스콧의 소설에서 영향을 받은 <리에주 주교의 암살> 등의 작품을 그렸고, <파우스트>의 프랑스어 번역판에 삽입될 석판화도 제작했습니다.
풍경화가들과의 교류
또한 영국 풍경화가인 존 컨스터블, 윌리엄 터너 등 과 교류했습니다.
이 시기에 받은 영향은 그의 작품 소재에 평생 영향을 미쳤습니다.
낭만주의 화가들의 극찬
1827년, 들라크루아는 낭만주의의 절정에 달한 <사르다나 팔루스의 죽음>을 살롱전에 출품했습니다.
아시리아 왕 사르다 나팔루스의 몰락을 주제로 한 바이런의 희곡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격렬한 움직임과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가 넘쳐 났습니다.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낭만주의 화가들로부터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역사적 작품
1830년, 들라크루아의 대표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완성되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집권과 몰락, 왕정복고 등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았는데, 1830년은 파리에서 혁명당원들이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를 폐위시키고, 오를레앙 공작이 루이 필리프로 즉위한 해였습니다.
7월 혁명
이 작품은 루이 필리프가 즉위한 해였습니다.
이 작품은 루이 필리프가 즉위한 계기가 된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여 그려진 것으로, 프랑스혁명 정신의 상징으로 불리며 1831년 살롱전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형 앙리에게 보낸 편지
들라크루아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조국을 위해 직접 싸우지는 못했을지라도 최소한 조국을 위해 그림을 그릴 수는 있다'라는 편지를 형 앙리에게 보냈습니다.
루이 필라프는 사비를 털어 이 그림을 즉각 구매했는데, 작품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민중을 선동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해서였습니다.
훈장 수상과 모로코 수첩
1831년에 들르크루아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1832년 외교 사절단의 일원으로 모로코에 갔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약 5개월을 보내면서 그는 이국의 역사와 강렬하게 빛나는 투명한 태양에 크게 영감을 받고 수많은 크로키와 기록들을 <<모로코 수첩>>으로 남겼습니다.
모로코에서의 들라크루아
그는 모로코에서 받은 감흥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곳의 모든 거리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숭고함이 현실이 되어 나를 괴롭힌다. 한걸음을 뗄 때마다 완성된 작품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모로코의 유대인 결혼식>, <모로코 군대의 기병>, <하렘의 알제 여인들> 등과 같은 작품들이 이때의 영향으로 탄생했습니다.
조르주 상드와의 만남
1834년, 그는 일생에 가장 중대한 여인이 되는 조르주 상드를 만났습니다.
소설가 상드는 피카소, 빅토르 위고, 리스트 등 수많은 남성 편력과 특히 쇼팽의 뮤즈로 유명합니다.
들라크루아는 쇼팽과 상드의 관계가 시작되기 전에 그녀를 만났으며, 얼마 후에는 쇼팽을 만나 친분을 나누었습니다.
쇼팽과 상드와 들라크루아
쇼팽이 상드와 관계를 지속하고 있을 때는 물론, 쇼팽이 그녀와 헤어져 온 사교계가 상드를 비난할 때도 쇼팽을 자주 찾아가 위로하는 한편, 그녀에 대한 애정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상드와 쇼팽이 공식적인 연인이었을 때 세 사람은 보기 드문 우정을 나누었으며, 들라크루아는 두 사람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작품으로 남은 두 사람
이런 관계를 들라크루아가 상드와 쇼팽을 그린 그림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 그림은 후일 수집가들이 둘로 나누었고, 현재 쇼팽 부분은 루브르 박물관, 상드 부분은 덴마크 코펜하겐의 오르드룹고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대규모 장식화 제작
들라크루아는 모로코에서 돌아온 이후 루이 필리프가 집권하는 동안 정부 주도의 대규모 장식화들을 그렸습니다.
부르봉 궁 알현실의 벽화, 베르사유 궁 역사박물관의 전쟁 미술관에 걸린 <타유부르의 전투>,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등을 그렸으며, 부르봉 궁 알현실 입구와 도서관 천장화, 파리 시청 평화의 방 천장화 등 수많은 대작을 그렸습니다.
르네상스의 계승자
1848년에 파리 시청의 천장화들이 공개되자 신문 기자들을 그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대한 계승자'라고 평했습니다.
그런 한편 들라크루아는 살롱전에도 꾸준히 작품을 출품했습니다.
많은 작품활동
친밀하게 교류하던 조르주 상드나 쇼팽 등의 초상화, 사화상과 그가 평생 관심을 두었던 문학 작품들을 소재로 한 <오필리어의 죽음>, <공동묘지의 햄릿과 호라티우스>, <돈 주앙의 난파선>, 월터 스콧의 <<아이다호>>를 소재로 한 <레베카의 납치> 등도 이 시기에 그렸습니다.
정부가 의뢰한 작품들
1848년에 공화정이 수립된 후에도 들라크루아는 정부의 의뢰로 <피톤을 죽이는 아폴론>을 그리는 등 정부가 주도하는 작업을 계속했으며, 제2제정 시대인 1855년에는 레종 도뇌르 3등 훈장을 받고 프랑스 학사원 회원이 되었습니다.
건강을 잃은 그
들라크루아는 종교적, 신화적, 문학적, 역사적 소재를 바탕으로 엄청난 크기의 대작들을 남겼으며, 특히 1830년대 이후부터 지나치게 많은 일거리들을 처리하느라 건강을 잃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1850년이 되면 가까운 친척과 친구들이 모두 죽고 홀로 남겨지면서 생의 기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들라크루아의 마지막
들라크루아는 어린 시절부터 풍부한 인맥과 신사다운 품격, 냉철한 이성과 박식함을 지녔으며 활발히 사교 활동을 했으나, 이후부터 샹로제에 있는 작업실이나 파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 틀어박혔습니다.
들라크루아는 1863년 8월 13일 파리의 아파트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엄청난 그의 작업량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미술에 헌신한 들라크루아의 작업량은 경이로울 정도여서, 죽은 후 작업실에 남겨진 소묘, 파스텔화, 유화들만 해도 9천여 점에 달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가 20세 무렵부터 쓰기 시작한 <<저널>>이라는 일기와 수많은 서간, 작업 중이던 <<미술 사전>>등이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파리 퓌르스텐베르그 광장에 있는 그의 아파트는 1971년 그를 기념하는 국립박물관이 되었습니다.
-출처-
Eugène Delacroix Eugène Delacroix — Wikipédia (wikipedia.org)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사르다나 팔루스의 죽음>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프레데리크 쇼팽의 초상>
<조르주 상드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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