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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38. 카미유 코로 - Jean-Baptiste-Camille Cor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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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Baptiste-Camille Corot

 

Jean-Baptiste-Camille Corot

 

코로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풍경화가로, 신고전주의를 계승하고 인상주의의 발판을 마련한 화가로 여겨집니다.

 

낭만주의나 사실주의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일생 독자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아버지 코로

 

"예술의 아름다움이란 자연으로부터 받은 느낌으로 가득 찬 진실이다."

 

라는 그의 말처럼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한 섬세하고 시적인 작품으로 생전에 엄청난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그림만큼이나 조용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말년에는 젊은 화가들에게 '아버지 코로'라고 불릴 정도로 존경받았습니다.

 

 

영향력 있는 화가

 

사후 그의 명성은 인상파 화가들에 의해 가려졌으나, 그의 예리한 자연 관찰과 유화 기법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생전 3천여 점의 그림을 남겼는데, 6천여 점이 미국에 있다고 할 정도로 가장 모작이 많은 화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코로의 출생과 어린 시절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는 1796년 7월 16일 파리에서 부유한 포목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처음에 아버지의 가업을 잇고자 했으며, 어린 시절 회화에 관심이 있었던 흔적은 없습니다.

 

 

루소의 영향

 

루앙 중등학교와 프와시의 기숙학교 등에서 고전교육을 받았고, 장 자크 루소의 저작을 좋아했습니다.

 

그의 범신론적인 자연 사상이 드러나는 시적인 풍경화들은 루소의 영향이 컸습니다.

 

 

포목상 사원 시절

 

1815년, 그는 파리의 한 포목상에 수습 사원으로 들어가 포목 사업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어떤 계기에서인지 그림에 관심이 생겨 아카데미 쉬스의 야간반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코로

 

그는 평생 느긋하게 천천히 작풍을 발전시켰는데, 원래 성격이 느긋했기 때문인지 화가가 되기로 확고한 결심을 할 때까지도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1822년, 그는 포목상을 그만두고 화가로 전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의 후원

 

여기에는 아버지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볼테르 강변에 화실을 마련하고 고전적인 풍경화가 아실 에트나 미샬롱, 장 빅토리 베르탱 등에게 그림을 배웠습니다.

 

 

최초의 야외 작업

 

그는 강과 숲 풍경을 무척 좋아했고, 노르망디와 퐁텐블로 숲을 자주 찾아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야외에서 스케치를 하고 작업실에서 작품을 완성하던 기존 화가들과 달리 그는 야외에서 작품을 완성한 최초의 화가였습니다.

 

이런 작업 방식은 오늘날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유물처럼 알려져 있지만, 코로가 선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여행

 

1825년부터 1828년까지 코로는 이탈리아를 여행했습니다.

 

로마, 캄파냐, 나폴리, 베네치아 등을 여행한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때 코로는 한 친구에게 쓴 편지에 '내가 생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오직 풍경을 그리는 것이라네'라고 썼습니다.

 

 

풍경화와 유화

 

이때부터 코로는 풍경화와 유화를 본격적으로 발전시켰고, 이것이 코로 작품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로마에 체류할 당시 코로는 <파르네세 정원에서 자라본 콜로세움>, <파르네세 정원에서 바라본 로마 대광장> 등을 그리면서 형태와 빛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빛을 재해석하여 표현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인상주의의 선구자

 

<나르니 다리>

 

1827년, 코로는 로마에서 파리로 <나르니 다리>를 보냈고, 이 작품은 그해 살롱전에 전시되었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의 나르니 다리를 그린 이 작품에서 그는 대담한 터치와 뚜렷한 명암, 교각과 강, 초목을 강한 빛으로 처리한 기법 등을 선보이며 후일 인상주의의 선구자로 여겨지게 됩니다.

 

 

스케치 여행

 

코로는 로마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여행을 다니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여름이면 스케치 여행을 떠나곤 했습니다.

 

1829년에는 브르타뉴, 노르망디 등지를, 1830년에는 샤르트르, 노르망디, 노르 지방을 여행하며 다양한 풍경을 그렸습니다.

 

 

애착 있는 작품의 탄생

 

<샤르트르 대성당>

 

이 시기에 그린 <샤르트르 대성당>은 코로 자신이 특별히 좋아한 작품으로, 그는 거의 죽을 때까지 이 작품을 소장했습니다.

 

그 밖에도 이탈리아를 두 번 더 방문했으며, 아비뇽을 비롯한 프랑스 남부 지방, 스위스, 네덜란드, 런던 등 일생 여러 지방을 널리 여행하면서 그림을 남겼습니다.

 

 

살롱전 수상

 

1833년, 그는 퐁텐블로 숲을 그린 풍경화로 살롱전에서 처음으로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이후 그는 <악타이온에게 놀란 디아나 여신>, <황야의 성 제롬>, <호메로스와 양치기들> 같은 신화나 성서의 내용과 풍경화를 결합한 작품이나 <볼테라에서 바라본 풍경>, <나폴리 주변의 경치>, <음악회> 등을 꾸준히 살롱전에 출품하면서 서서히 프랑스 화단에 자리 잡았습니다.

 

 

인정받는 화가

 

그는 역사를 주제로 한 풍경화의 대가로 인정받았으며, 순수하고 진지한 시선으로 자연주의가 깃든 시적인 풍경을 그린다고 평가받았습니다.

 

1845년 살롱전에 전시된 <호메로스와 양치기들>을 보고 시인 보들레르는 "진실로 현대적인 풍경화를 개척했다.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다."라며 감격했다고 합니다.

 

 

대중적인 사랑

 

또한 그의 목가적이고 시적인 정취를 담은 풍경화들은 쿠르베를 위시한 사실주의 화가들의 대담하면서 일상의 진실을 그대로 드러낸 풍경화와 비교되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감성적인 그의 그림

 

코로는 그림에 있어 감성 표현을 중시했는데, 역사나 신화, 성서를 다룬 작품에서조차 자신의 감성을 드러내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는 "현실성은 예술의 일부이지만 감정은 그 전부다. 그대를 인도하는 것은 그대의 감성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절정에 달한 명성

 

1840년대 중반 이후 코로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는 1846년에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1849년에는 살롱전 심사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의 작품 구입

 

<아침 - 요정들의 춤>

 

그리고 1850년 나폴레옹 3세가 <아침 - 요정들의 춤>을 구입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떨쳤습니다.

 

아침 햇살이 은은하게 비추는 초원에 님프들이 춤추는 모습이 담겨있는 이 작품은 코로 특유의 이상주의와 서정성이 절정에 도달한 작품입니다.

 

 

몽환적인 그의 그림

 

코로는 자칫 단순하게 보일 만한 풍경까지 면밀한 관찰을 토대로 한 세심한 묘사와 화면 전반에 깔린 부드러운 은회색 색조, 시와 음악이 흘러나오는 듯한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1등 상을 수상했으며, 그해 나폴레옹 3세는 <마르쿠시의 추억>을 구입했습니다.

 

 

음악과 그림

 

그러나 세간의 평판은 코로에게 그리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조용하고 검소한 성격이었으며, 그림을 그리는 일 외에는 정치나 사교 생활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일생을 지배한 것은 음악과 그림, 두 가지뿐이었습니다.

 

 

오직 그림만 그린 코로

 

동시대 다른 화가들이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사회적 변화나 정치 참여적 성향의 작품을 제작할 때도 그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직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자신의 감정을 일깨우는 풍경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부모의 후원으로 일생 부족함 없이 생활했으며, 부모가 죽은 후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바르비종으로의 이주

 

1850년대에 코로는 퐁텐블로 숲 근처의 바르비종으로 이주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장 프랑수아 밀레, 테오도르 루소 등과 교류하면서 자연과 교감하며 작품을 그렸습니다.

 

젊은 화가들은 온화하고 관대한 성품에 호의적인 태도를 갖춘 신사였던 그를 많이 따랐고, 그중에는 인상주의 운동의 선두에 섰던 카미유 피사로도 있었습니다.

 

 

꾸준한 작품 활동

 

말년에도 그는 화가로서 끊임없이 발전했습니다.

 

<몸단장>

 

<모르트퐁텐의 추억>

 

1859년 작 <몸단장>은 자연을 배경으로 한 인물 묘사에 있어 새로운 미학을 보여준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1864년 살롱에 전시된 <모르트퐁텐의 추억>은 코로 특유의 서정적이고 시적인 묘사가 완성의 경지에 이르러 그를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코로의 마지막

 

코로는 19세기 프랑스 화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많은 존경을 받으며, 1875년 2월 22일에 79세의 나이로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유해는 페르 라세즈에 안치되었습니다.

 

후대로 갈수록 코로의 작품들은 지나친 이상주의로 과장되고 공허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그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미술계에 풍경화의 유행을 불러일으켰으며, 뒤이어 인상주의가 태동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출처- 

Jean-Baptiste-Camille Corot Jean-Baptiste-Camille Corot - Wikipedia

<샤르트르 대성당> Jean-Baptiste-Camille Corot - The Cathedral of Chartres - WGA5282 - La Cathédrale de Chartres — Wikipédia (wikipedia.org)

<나르니 다리> Fichier:Corot - The Bridge at Narni, 1827.jpg — Wikipédia (wikipedia.org)

<아침 - 요정들의 춤> Fichier:Camille Corot - A Morning. The Dance of the Nymphs - Google Art Project.jpg — Wikipédia (wikipedia.org)

<몸단장> Fichier:Corot - La Toilette, 1859.jpg — Wikipédia (wikipedia.org)

<모르트퐁텐의 추억> Souvenir de Mortefontaine - Jean-Baptiste Camille Corot - Musée du Louvre Peintures MI 692 bis - Souvenir de Mortefontaine — Wikipédia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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