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éodore Géricault
장 루이 앙드레 테오도르 제리코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선구자입니다.
그는 단 12년간 작품 활동을 했으며, 대표작도 많지 않습니다.
낭만주의의 아이콘
하지만 낭만주의의 태동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사실주의적 묘사 기법은 구스타브 쿠르베 등 여러 화가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작품뿐만 아니라 삶과 기질에 있어서도 낭만주의 예술자의 아이콘으로 여겨집니다.
비극적인 그의 인생
그는 열정적이고 격렬한 성정, 자유로운 기질을 지닌 멋쟁이 신사였던 한편, 우울증을 앓았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33세의 나이로 요절한 그의 인생을 작품만큼이나 격정적이고 화려하며, 비극성이 도드라집니다.
제리코의 출생과 어린 시절
제리코는 1791년 9월 21일 프랑스 루앙에서 태어났습니다.
법조인이자 사업가인 아버지 덕분에 중산층 가정에서 풍족하게 자라며 고전 교육을 받았습니다.
9세 무렵 가족들이 파리로 이주했으며, 17세 때는 어머니가, 21세 때는 외할머니가 사망하면서 유산을 상속받아 평생 풍족하게 화가 인생을 추구할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제리코
17세 때부터 그는 카를 베르네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일생 두 가지 일에만 열중했는데, 그것은 그림과 말이었습니다.
승마에 빠진 그
어릴 때 승마에 푹 빠진 이래,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도 말을 사고 승마를 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납고 거친 말을 길들이는 것을 무척 좋아했으며, 말을 타다 부상을 당해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것 역시 승마로 인해 척추 부상이 도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가 스포츠나 말을 그리는 데 뛰어났던 베르네 아래에서 수학한 것은 놀랍지 않습니다.
게랭의 화실 시절
2년 후 그는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의 화실에서 공부하며 고전 회화를 연구했고, 신고전주의적 양식을 배웠습니다.
이때 후배인 들라크루아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듬해에는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갔습니다.
루벤스의 영향
이 시기에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옛 거장들의 작품을 즐겨 모사했는데, 특히 루벤스의 역동적인 화풍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말이나 군인을 역동적으로 묘사한 것이 많습니다.
살롱전 금상 수상
1812년에는 20세의 나이로 <돌격하는 경기병>을 출품해 평단을 놀라게 하며 살롱전에서 금상을 수상했습니다.
(1812년은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침공했으나 추위와 기아로 결국 최각한 해였다)
이 작품은 모스크바 전장에서 고전하는 순간의 기병 장교를 그린 것으로, 정확한 관찰과 탄탄한 구성, 거친 터치고 인한 역동성, 화폭에 넘쳐나는 말과 장교의 에너지, 전장이 가진 비극성과 호쾌함 등으로 보는 이들을 압도했습니다.
전쟁화를 즐겨 그린 제리코
제리코는 이후 <전장을 떠나는 부상당한 흉갑기병>, <무장 기병의 초상> 등의 전쟁화를 더 그렸습니다.
전쟁과 군인, 말에 대한 열정으로 그는 1815년 벨기에 전투에도 사수로 참전했습니다.
짧았지만 끔찍한 전쟁의 실상을 경험한 그는 이후 전쟁화를 그릴 때 전쟁의 비극성과 전장에 선 인간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로마에 머물렀던 그
1816년에는 이탈리아 로마에 주로 머물면서 고전주의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르네상스와 17세기 대가들을 좋아했고, 미켈란젤로와 카라바조에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파리로 귀국
파리로 귀국한 후에는 1819년 살롱전에 <메두사 호의 뗏목>을 출품했습니다.
제리코는 비극적인 사건이 지닌 에너지에 매료되곤 했는데, 이런 사건들은 역동적인 표현 방식, 극적인 색채 효과 등 제리코의 화풍과 어우러져 비장미가 극대화되었습니다.
메두사 호의 비극
1816년 7월 2일, 프랑스 식민지인 세네갈에 정착할 이주민과 관료들이 탄 메두사 호가 난파당했습니다.
승선한 500여 명 중 400여 명이 난파선 조각으로 뗏목을 만들어 표류했고, 13일 만에 구조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15명뿐이었는데, 이들이 난파 도중 인육을 먹으며 살아남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절정에 달한 그의 테크닉
제리코는 이 사건에서 오랜 표류 끝에 구도선을 발견하고 희망에 차 기뻐 날뛰는 장면을 선택했는데, 뗏목 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시체들과 살아남은 이들이 대비를 이루면서 비장감이 극대화되었습니다.
해부학적인 인체 묘사를 비롯해 인간 심리의 표현이 절정에 달해 있으며, 역동적인 인체 표현, 강한 명암과 색채 효과 등 극적인 요소로 가득했습니다.
탄압받은 그의 작품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한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사실주의에 고전주의적 웅장함을 결합시킨 화풍이 낯설었고, 무엇보다 주인공과 주인공의 영웅적인 행위가 없는 것이 아카데이 양식에 맞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 사건에 대한 정부의 책임 회피 등 정치적인 이유로 탄압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제리코의 은둔생활
제리코는 이런 반응에 실망하고 우울증에 빠져 퐁텐블로에서 얼마간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이후 낭만주의 회화의 시발점이 되는 작품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제리코는 <메두사 호의 뗏목>을 제작할 때 시체 안치소를 정지적으로 방문해 인체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사회적인 그의 작품
이런 연구와 사형제도에 반대한다는 사회적인 관심으로 그는 이 시기에 <단두대에서 잘린 머리들>, <절단된 사지> 등의 작품도 제작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이 작품들을 보고 <사형수 최후의 날>이라는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영국에서의 2년
제리코는 1820년부터 약 2년간 영국에 체류했습니다.
이때 <메두사 호의 뗏목>을 선보였는데, 프랑스에서와 달리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곳에서 그는 영국의 자연스러운 사실성이 배어나는 작품들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조지 스텁스의 작품
특히 말의 해부학에 대한 책을 출간할 정도로 말을 그리는 데 빼어났던 조지 스텁스의 작품들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런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노동자, 거지, 숙녀 등을 화폭에 담았고, 더비 경주 장면 등 운동 경기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소묘를 석판화로 제작하여 팔기도 했습니다.
승마 사고
1822년, 제리코는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폐병과 우울증을 앓고 있던 그에게 영국의 습한 기후와 어두운 날씨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어린 시절부터 해 온 승마는 그의 육체에 부담을 주었고, 이해에 세 번이나 승마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승마를 포기하지 않아 부상이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더는 대작을 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신병원 환자들의 초상화
이 시기에 제리코는 담당의사였던 조르주 박사의 권유로 정신병원 환자들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도박에 중독된 여인>, <절도에 중독된 남자> 등 10여 점의 초상은 동일한 구도와 배경을 가지고 유사한 색채로 표현되어 있으며, 해부학적으로 완벽하다고 평가받습니다.
미화나 과장 없이 중독자들의 초췌한 모습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들을 그린 의도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우울증 치료의 일환이라는 설, 중독자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 사회적 문제들을 상기시키고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그렸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최후의 걸작으로 제리코는 사회적 리얼리스트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습니다.
제리코의 마지막
1823년 말, 척추 수술을 받은 곳이 악화되어 제리코는 이듬해 1월 26일 사망했습니다.
사후 그는 낭만주의의 화신으로 숭배되었으며, 초췌하고 마른 얼굴은 데스마스크로 복제되어 수없이 팔려 나갔습니다.
-출처-
모든 사진 출처 Théodore Géricault — Wikipédia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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