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y Warhol
앤디 워홀의 출생과 어린 시절
앤디 워홀은 1928년 경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앤드류 워홀 라이입니다.
체코 출신의 가난한 석탄 광부 이민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 아버지는 그가 14세 무렵 오염된 물 때문에 병으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또한 어린 시절 몸이 약해 자주 아팠으며 8세 때는 류마티스성 열에 의해 생기는 병으로 희귀하고 치명적인 신경계 질환을 앓으면서 1년 가까이 학교에 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워홀이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처음으로 그림 수업을 받게 됩니다.
어린 시절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그림이었으며 가난했지만 미술학도를 꿈꾸었던 그의 어머니는 앤디 워홀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9살 때 카메라를 사주었는데 그 때에 그는 영화도 열렬히 좋아하게 됩니다.
앤디 워홀의 신비주의 마케팅
이러한 불우한 그의 가정환경은 후일 앤디 워홀을 아메리칸드림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만들었으며 워홀은 이에 몇 가지 소문을 덧대어 본인을 PR 함으로써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 전반을 신비함으로 포장하고자 출생증명서가 위조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그 외의 기타 개인정보들도 모두 감추거나 부정을 하곤 했습니다.
“나는 미스터리로 남아있기 위해 내 배경을 절대 밝히지 않고 질문을 받을 때마다 모든 것을 다르게 대답합니다.”
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앤디 워홀의 예술가로서의 시작
워홀은 어린 시절의 본인을 부정하는 듯한 인터뷰를 종종 하긴 했지만 어린 시절 워홀의 부모님은 그의 예술적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생애 저축했던 돈을 모두 워홀의 대학 교육에 쓰이도록 유언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그 덕에 그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으며 피츠버그의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게 됩니다.
이후 1949년 미술 학사학위를 받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상업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위해 뉴욕으로 넘어가 잡지 일러스트 작업과 광고 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1950년대 <보그>, <하퍼스 바자> 등의 패션 잡지 광고에 삽화를 그리거나 각종 상업 광고물을 제작하는 아트 디렉터로 젊은 나이에 크게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만든 독특하고 기발한 스타일의 광고물은 각종 어워드에서 수상하고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워홀은 1950년대 후반에 회화에 더욱 집중해서 ‘위대한 예술가’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그 시기에 그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초반에는 배트맨, 슈퍼맨 등 만화 속 인물 작품을 제작하면서 팝아트에 동참하였으나 이는 로이 릭턴스타인의 작품에 가려져 큰 빛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 이후 대중 만화를 그리는 것을 그만두고 달러 지폐, 스프캔, 유명인의 초상화 등 본인만의 주제를 찾게 되었으며 기법도 실크스크린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1961년 대량 생산된 소비사회의 물품들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만의 팝아트 소재를 발견하게 됩니다.
1962년, 워홀은 <캠벨 수프 통조림>, <2달러 지폐들> 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하면서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 이후 화려하고 선명한 색상으로 메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엘비스 프레슬리 등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된 할리우드 스타들의 초상화를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초상화가 유명해지면서 워홀은 사교계 명사들과 스타들로부터 수백개의 초상화 커미션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초상화는 전통적인 초상화의 기능인 인물의 내면이나 성격을 드러내는 역할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대중문화와 소비문화의 산물 그 자체로 작품성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신문 사진을 이용한 실크 스크린 작품도 제작하게 되는데 <피로 물든 인동 폭동>, 전기의자 연작, 재클린 케네디의 초상 등은 그 시대의 상황과 그 사건 자체가 지닌 시각적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미디어의 어떤 보도 사진들 보다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되었으며 미디어의 한계를 일깨워 주기도 했습니다.
앤디 워홀의 "The Factory"
1962년 워홀은 대형 창고형 아트 스튜디오인 “The Factory”를 열게 됩니다.
자신의 작품이 산업화된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들어지는 것을 이미지화 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으며 실제로 팩토리에서는 2년간 2천 점이 넘는 작품이 제작되게 됩니다.
그의 팩토리는 그냥 작업실을 뛰어넘어 뉴욕의 명소가 되었으며, 팩토리는 당대 예술 현장의 중심이 되게 되었습니다.
믹 재거, 에디 세즈윅 등과 함께 끊임없이 파티를 열었으며 영화, 음악 작업 등 다양한 작업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이후 250여편의 영화를 제작했으며 벨벳언더그라운드 밴드의 프로듀싱과 재킷 디자인을 하는 등 예술 활동을 끊임없이 이어 나갔습니다.
총격 사건
그러던 1968년 6월 3일, 발레리 솔라 나스에게 저격당해 두 발의 총알을 맞았으나 몇 차례의 수술 끝에 극적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녀는 “워홀이 내 인생을 지배하고 있다”고 저격 이유를 밝혔으며 그 후 체포되어 유죄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워홀은 자신의 총상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 <해골> 이라는 작품을 만들었으며 총격 사실과 더불어 그의 팩토리는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앤디 워홀의 마지막
그 이후로도 닉슨의 중국 방문에 맞춰 <마오> 연작을 제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1987년 2월 21일 만성적인 담낭의 문제로 뉴욕의 코넬 의료센터에서 담낭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다음날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를 초래하는 페니실린 합병증을 겪으면서 1987년 2월 22일 58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Andy Warhol https://theskateroom.com/artists/andy-warhol-skateboards
<Campbell's Soup Cans> https://www.moma.org/learn/moma_learning/andy-warhol-campbells-soup-cans-1962/
<Mint Marilyn> https://www.creativeboom.com/inspiration/warhol-women-andy-warhols-signature-silkscreen-portraits-of-the-worlds-most-famous-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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