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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잭슨 폴락 - Jackson Poll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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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son Pollack

 

Jackson Pollack

 

잭슨 폴락의 출생과 어린 시절

 

잭슨 폴락은 1912년 1월 28일 미국 중서부 지방인 와이오밍 주의 코디에서 태어났습니다.

 

폴락은 가족과 함께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 등지로 옮겨 다니며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막내였던 그는 16세에 리버사이드 고등학교애서 퇴학을 당할 만큼 거칠고 반항적인 청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잭슨 폴락의 예술가로서의 시작

 

1930년에 큰형 찰스가 다니던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들어간 이후로는 정학하여 미술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회화 외에 그가 크게 관심을 가진 분야는 정신분석으로 폴락은 10대 때 부터 알코올 중독과 분노 조절 장애 등을 겪으면서 이를 치료하기 위해 치료를 받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 만의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940년대 초 부터 신진 예술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그의 유명한 화법인 ‘드립 페인팅’을 소개하면서 미국 미술 시장에 파격을 안겨주었으며 삼류 혹은 예술에 무지하다고 인식되었던 미국 미술을 지금과 같은 위치로 끌어올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럽사회에서는 미국인을 예술에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나 미국 회화가 유럽의 모더니즘 회화와 경쟁할 수 있게 한 장본인이 바로 잭슨 폴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잭슨 폴락의 결혼

 

 폴락의 작품에 있어서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시기는 바로 그가 여성 화가 리 크래스너와 결혼한 1945년 맨해튼을 떠나 롱아일랜드의 시골로 이주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연과 가깝게 생활하면서 폴락은 불안했던 마음에 평화를 찾으면서 작품 활동에 매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그의 시그니쳐 ‘액션 페인팅’을 구현시키기 위해 캔버스 천을 이젤에 고정하지 않고 바닥에 펼쳐두고 전통적인 붓을 사용하는 대신 막대기, 손, 칼 등을 이용하여 드리핑 기법으로 작품을 그려나가게 되었습니다.

 

 

혹평과 호평을 한번에..

 

폴락은 그의 첫 번째 드리핑 작품들은 1947년 전시회를 통해 세상에 내놓았으며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게 되었습니다.

 

한편에서는 그를 미국의 가장 위대한 살아있는 화가로 칭송했고, 또 한편에서는 아무런 의미 없는 물감의 흩뿌림이라며 지금까지의 미술을 죽여버렸다는 의미로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에 빗대어 ‘잭 더 드리퍼’라고 부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잭슨 폴락은 자신의 작품은 단순히 물감을 뿌리기만 한 것이 아니며 물감의 드립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고 정확한 방향성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의 초기 드리핑 작품 둥 하나인 <다섯 길 깊이> 작품을 엑스레이로 검사하자 제일 위 물감 층 아래 물감 형태가 인체의 모양으로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나며 그의 말에 무게가 실리게 되었습니다.

 

 

잭슨 폴락의 작업 과정

 

점차 대중 매체의 주목을 빠르게 받게 된 그는 1950년 그의 작업방식을 사진작가 한스 나 무트가 영화로 촬영하여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상영을 하기도 했습니다.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이 회화의 정점을 여실히 드러내는 최고의 걸작이라며 극찬했고 입체적이고 대 자연을 연상케 하는 추상표현 회화의 대표작이라며 추앙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액션 페인팅’이라는 독창적인 작업방식으로 인해 대부분의 작품 크기가 아주 컸으며 그 시기 미국에는 고층건물이 많이 들어서면서 컬렉터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잭슨 폴락의 알코올 의존증

 

하지만 대중의 관심에 큰 부담감을 느낀 폴락은 1950년대 후반부터 다시 알코올에 의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폴락이 이 시기에 예술가로서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으며 대중의 비판에 아주 예민해져 있었다고도 했습니다.

 

폴락은 자신이 회화 화가로서 큰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일각에서 떠드는 '근본 없는 화가’, ‘소묘도 못하는 화가’ 등의 소문을 견디기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림 속에 있을 때 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내가 어떤 행위를 저질렀는가를 알게 되는 것은, 그림과 친숙해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한 뒤에야 가능해진다. 그림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지니기 때문에 나는 그림을 고치거나 이미지를 부수는 일에 대해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나는 그런 식으로 그림이 완성되기를 허용할 뿐이다. 나 자신과 그림의 접촉이 끊어지는 경우는 결과가 엉망진창으로 나타날 때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슨 그림과 나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완벽한 조화 관계가 성립되며, 이때 그 그림은 괜찮은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라는 그의 작업일지 중에서도 그의 불안한 정신상태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잭슨 폴락의 마지막

 

폴락은 20세기 미술의 아이콘으로 불릴 만큼 명성이 세계적으로 치솟았지만 알코올 중독과 슬럼프라는 위기에서 헤어 나오기가 너무 힘들었으며 정신적 방황을 계속하던 중 1956년 8월 11일 44세의 젊은 나이에 만취 상태로 애인과 친구들을 태우고 차를 몰다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사망 이후 아내 크래스너는 폴락의 모든 작품을 박물관에 기증하게 됩니다. 

 

 

그의 천재성

 

지금 그의 그림을 보면 그다지 새롭게 다가오거나 파격적으로 다가오지 않겠지만 그가 작품 활동을 했던 그 시기를 생각해 보면 새로운 스케일, 새로운 표현과 터치 등 전례 없이 강력하고 놀라운 작품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가 한참 작품활동을 이어간 1940-50년대는 대한민국 역사의 한 장면으로 보자면 6.25 전쟁, 광복을 겪을 시기였으며 누드화의 등장만큼 쇼킹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전통적인 그 무엇에도 머물기를 거부하는 폴락의 반항적인 성격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으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준 선구자였습니다.

 

그의 등장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추상미술의 챕터를 열어주었으며 미국 미술의 자존심으로 불릴만하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다섯 길 깊이>, <One : No.31>, <부활절과 토템> 등이 있습니다. 

 

 

 

 

 

-출처-

Jackson Pollack http://www.wonderful-art.fr/le-saviez-vous-jackson-pollock-et-le-chamanis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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