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vard Munch
에드바르 뭉크의 출생과 어린 시절
에드바르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노르웨이의 뢰텐이라는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군의관 출신 의사인 크리스티안 뭉크이며, 다섯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뭉크는 다섯남매 중 둘째였는데 누나와 3명의 동생들 사이에서 자랐습니다.
뭉크가 삶과 죽음, 인간 존재의 근원에 자리한 고독과 불안 등을 주로 표현한 것은 태생적으로 병약했고 그가 5세가 되던 1868년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고 14세 때는 그가 잘 따랐던 누나인 소피에가 같은 병인 결핵으로 사망합니다.
뭉크의 어린 시절은 늘 죽음을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와 동생들 또한 불안장애와 강박, 공황장애로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어려서 경험한 가족의 죽음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작품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뭉크에게 미술은 가장 큰 취미였으며, 이 시기에 그의 그림의 주제는 주로 약병, 집안의 내부, 풍경 등이었습니다.
병약하여 주로 방 안에서 지냈던 뭉크는 종종 누워 집안의 사물들을 그리곤 했습니다.
“질병과 정신 착란, 죽음의 검은 천사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요람 위에서 나를 굽어보았다.”
라는 뭉크의 말은 그가 지닌 절망적인 분위기와 고립에서 오는 불안을 잘 설명해 주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병든 아이>, <죽음의 방>, <죽음의 침상 곁에서>와 같은 초기작에서 드러나는 질병에 대한 불안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뭉크의 화가로서의 시작
정식 미술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고 아버지의 바람으로 기술대학에 들어가서 공학, 물리학, 화학, 수학 등을 공부하지만 잦은 건강상의 문제로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고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881년 크리스티아니아에 있는 미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이듬해에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 6명과 함께 작업실을 빌려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후 1883년 산업미술전에서 전시를 시작으로 그의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 와중 화가 프리츠 탈로(Frits Thaulow)가 뭉크의 재능을 높이 사 파리로 보내주게 되었습니다.
이때 뭉크가 느낀 예술의 도시 파리는 3주를 머물렀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게 되었습니다.
뭉크의 뮤즈 밀리 탈로
1885년 뭉크는 밀리 탈로(Milly Thaulow)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는 이런 감정을 태어나서 처음 느껴봤다고 합니다.
뭉크는 밀리에게 일편단심의 순정을 바치지만,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뭉크가 26세에 파리의 에꼴 데 보자르로 유학을 가기 전까지 밀리와 연애들 하면서 뭉크는 끝없는 질투로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워했고 결국에는 여성 전체를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후 1889년 장학금을 받아 파리의 에꼴 데 보자르로 유학을 갈 수 있게 됩니다.
2년 가량 파리에 체류하면서 폴 고갱, 반 고흐, 툴루즈 로트레크 등에게 매료되면서 뭉크는 이들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두려움에 마주하는 도구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개인적인 감정을 그림에 반영하는 화풍을 발전시키게 되었습니다.
혹평 스캔들로 유명세를 타게 된 뭉크
1892년 뭉크는 베를린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는데 약 55점의 작품을 출품한 이 전시는 베를린 언론의 혹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 개인전은 8일 만에 막을 내리게 되는데 이는 후에 ‘뭉크 스캔들’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독일 언론은 “대충 얼버무린 듯 그려 더러는 이게 사람을 그린 건지 조차 분간이 안된다”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스캔들은 뭉크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고 그는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뭉크는 베를린에 머물면서 1908년 신경쇠약에 걸릴 때까지 화가로서 가장 중요한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1893년 <생의 프리즈 - 삶, 사랑, 죽음에 관한 시>의 연작 스케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인간 존재의 다양한 면을 담으려 한 그는 그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이 연작 중 1893년 작 <절규>와 1894년 작 <마돈나>로 유명합니다.
그의 제일 유명한 작품인 <절규>를 작업하게 된 계기를 밝힌 그는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한쪽에는 마을이 있고 아래에는 피오르가 있었다. 피곤하고 지친 느낌이 들었다. 해가 저물고 있었고, 구름이 피처럼 붉게 변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그 절규는 마치 실제처럼 들렸다.”
이 작품은 뭉크 자신이 본인의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내면세계를 활보하는 자아의 모습이며 같은 작품을 조금씩 변형시킨 수가 50종이 넘는 것을 보면 이 작품에 큰 애착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돈나>는 뭉크가 지닌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의미가 잘 표현된 작품으로 그에게 마돈나란 성스러우면서 남자를 유혹해 파멸로 모는 팜므파탈이기도 했고, 유혹적이면서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뭉크는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했습니다.
지구상의 온갖 아름다움이 당신의 얼굴에 머문다
당신의 입술은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열매를 맺는 과일처럼 붉은색이다
시체의 웃음
이제 삶이 죽음과 손을 잡는다
뭉크의 여성혐오증
1899년 뭉크의 여성혐오증이 심각해지는 계기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툴라 라르센이라는 상류 계층의 여성을 알게 되는데 그녀와 깊은 사이로 발전하면서 뭉크는 자신의 예술적 황금기를 맞게 되지만 그녀의 집착으로 얼마 안 가 헤어지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뭉크 앞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소동을 부리다 뭉크의 손가락에 총알이 관통하게 됩니다.
몇 년 후 <마라의 죽음>, <살인녀>를 그리는데 이 사건과 관련된 작품들로 꼽힙니다.
뭉크의 마지막
뭉크는 그 이후 더욱 심한 조울증과 알코올 중독, 불안과 환각 증세를 지속적으로 겪었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해 8개월간 요양을 하면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후 그의 작품은 보다 밝고 낙천적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말년에 뭉크는 저택에 홀로 지내면서 그림을 계속 그렸습니다.
눈병을 앓고 실명의 위기에 처했으나 이는 그에게 어떤 장애도 되지 않았습니다.
1944년 1월 23일 80세의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았습니다.
-출처-
Edvard Munch https://fr.wikipedia.org/wiki/Edvard_Munch
<절규> <마돈나> https://fr.wikipedia.org/wiki/Edvard_M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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