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ssily Kandinsky
칸딘스키의 출생과 어린 시절
바실리 칸딘스키는 1866년 12월 16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습니다.
바실리 실베스르토비치의 아들로 아버지는 몽골계 시베리아 출신이고 어머니는 모스크바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실리 칸딘스키는 자라면서 아시아 전통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으며 부유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나 피아노와 첼로, 미술 등 부르주아식 교육을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랐고 미술뿐 아니라 음악과 전반적인 예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크림반도 등 유럽 등지를 여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칸딘스키의 인생을 바꾼 모네의 그림
1886년 모스크바 대학에 들어가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법학 학위를 취득하고 졸업 후 교수로서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성공적인 법학자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칸딘스키는 민속학과 인류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러시아 북부 볼로그다 지방에 파견됐을 당시 그곳 러시아의 전통 농가 건축과 공예품, 풍물을 접하고 큰 인상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1895년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회에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그림을 보고 큰 감명을 받고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팔레트의 위력을 보았다. 그 그림은 내 감추어진 부분까지, 내 꿈속까지 파고들어 왔다..... 나의 매혹적인 모스크바는 화면 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칸딘스키의 다양한 시도
이후 1896년 독일 뮌헨으로 건너가 아즈베 미술학교에 들어갔고 안톤 아즈베 및 프란스 폰 슈투크에게 사사하며 훗날 바우하우스에서 함께 할 동료 파울 클레(Paul Klee)를 만나게 됩니다.
1901년, 칸딘스키는 롤프 니츠키, 발데마르 헤커, 빌헬름 휴겐스 등과 함께 팔랑크스 전시 협회 및 미술학교를 조직하고 첫 전시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칸딘스키는 가브리엘 뮌터(Gabriele Munter)를 만나 함께 5년여 유럽 도시들을 여행하며 다양한 작품 시도를 했습니다.
칸딘스키는 화려한 색감, 대상의 실제 모습보다는 형태와 선, 색채만으로 표현하는 가능성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추상화가로서의 시작
칸딘스키는 화가로서 뿐 아니라 꾸준히 음악, 철학, 미술 이론을 깊이 탐구하면서 점차 추상화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가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칸딘스키는 모름지기 화가라고 하면 뚜렷한 선으로 명확한 주제를 그려야지 주제도 없이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예술가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저녁, 화실에 거꾸로 세워놓은 자신의 그림을 보고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그 순간 추상 회화를 그려야겠다고 다짐을 했다고 합니다.
청기사파의 결성
1910년을 전후로 선구적인 추상 회화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칸딘스키도 그들 중 하나였으며 그는 추상 회화를 하나의 개념과 화풍으로 정립시킨 중요한 인물로 꼽힙니다.
그 해, 최초의 추상적 수채화인 <무제>가 발표되었습니다.
이듬해, 칸딘스키는 뮌헨에서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와 함께 아방가르드 모임 ‘청기사파’를 결성하게 됩니다.
칸딘스키는 <인상>, <즉흥 X IV>, <구성 VII>, <검은 선들>, <검은 아치가 있는 풍경>, <가을> 등의 작품을 통해 독일 표현주의 회화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점점 그의 그림에는 구체적인 형태를 띈 대상은 사라져 가고 색채로 모든 것을 표현하게 됩니다.
바우하우스 시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독일을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가게 됩니다.
모스크바 미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러시아 과학예술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러시아 전역에 미술관을 설립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1922년,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서 회화와 미술이론을 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독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구성주의를 연구하면서 영향을 받아 수학적으로 제한된 엄격한 형태로 작업을 하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원은 그의 캔버스에 항상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되었습니다.
원은 그에게 가장 안정적인 동시에 불안정하며, 가장 간결하면서도 무한한 존재로 가장 균형적이고 통일된 완벽한 형태였습니다.
또한 강렬하지만 감정적인 색채 또한 그의 회화작품의 공통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일환으로 1930년 파리에서 열린 ‘원과 사각형’ 그룹의 전시회에 참여앴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무대 장식, 음악실 벽 장식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치의 탄압
1933년 나치는 ‘퇴폐 미술의 온상’ 이라고 바우하우스를 탄압하고 강제로 폐쇄하게 되었습니다.
칸딘스키와 건축가 힐베르스 하이머를 ‘불손한 생각’의 소유자로 치부했으며 칸딘스키의 작품 수십여 점도 몰수되어 경매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파리로의 이주와 그의 말년
이후 칸딘스키는 파리로 이주하여 프랑스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파리에서 그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작품활동을 이어 나가게 됩니다.
칸딘스키는 자신의 무의식과 ‘내적 필연성’에 몰두하였는데 이는 그의 가장 중요한 기초 개념으로 예술이란 대상을 맹목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해하고 인간의 감정을 순화시키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음악을 회화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선명한 색채를 통해 음악적인 감성을 역동적으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1944년 12월 13일, 칸딘스키는 뇌이쉬르센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가 남긴 작품과 이론들은 후일 미국과 프랑스의 추상 회화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20세기 새로운 미술의 영역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액션 페인팅, 타시즘, 캘리그래피 등이 그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들입니다.
-출처-
Vassily Kandinsky https://fr.wikipedia.org/wiki/Vassily_Kandin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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