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stav Klimt
구스타프 클림트의 출생과 어린 시절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 근교 바움가르텐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보헤미아에서 온 이민자로 금속세공사로 일하며 판화가로도 활동했으나 그리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클림트는 어린 시절 1873년 경제 위기와 함께 매우 어렵게 생활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14세가 되던 해에 다니던 학교마저 그만두게 되었지만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친척의 도움으로 빈의 국립 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되며 다음 해에는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가 입학하면서 형제는 함께 공부하고 일하게 됩니다.
클림트 형제의 상업적 성공
클림트 형제는 저명한 화가들의 주목을 받았고 1879년 친구 프란츠 마치와 빈 미술사 박물관의 중앙 홀 장식을 맡기도 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졸업 후 세 사람은 슈트라니 궁전, 라이헨베르크 극장 등을 장식하는 천장화를 그리거나 조형물 작업을 했으며 1883년에는 벽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공방을 열고 카를스바트 극장, 부르크 극장 등의 천장화를 그렸습니다.
동시에 클림트는 1886년경 부터 독자적인 작품활동을 이어 나가게 됩니다.
클림트의 독립과 인기
그는 여성의 관능미를 표현해 내는데 특출 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경멸을 담은 듯한, 무심한 표정의 여자, 그와 상반되는 화려한 색채와 장식적인 요소들을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그러한 클림트의 작품들은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 잘 드러나 있었으며, 상징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로 대중을 단숨에 사로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클림트는 특히 인물의 표정 등을 사진처럼 정밀하게 표현하는데도 무척이나 뛰어났으며 그 기술력에 우아한 분위기, 나른한 감정선 등을 더해 많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로 인해 여성들의 초상화 의뢰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큰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클림트의 이런 특별한 재능을 벽화 크루와 함께 작업한 엘리자베트 황후의 헤르메스 빌라, 빈 미술사 박물관 재단실 천장화 등에서도 뚜렷이 구별됩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888년 프란츠 요셉 황제로부터 ‘황금 공로 십자 훈장’도 받게 됩니다.
상실감을 작품으로 승화
1892년 클림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고 그 몇 달 후인 12월에는 동생 에스른트가 독감으로 사망하게 되면서 실의에 빠져 2,3년간 작품활동을 거의 하지 못할 정도로 슬픔에 빠져있게 됩니다.
그는 이 시기에 인상파와 상징주의, 정신분석학 등에 관심이 생겼고 그 위기를 극복하고 작품으로 표현한 최고의 걸작 <사랑>을 탄생시킵니다.
사랑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사랑하는 연인들 뒤로 몇몇 형태의 얼굴들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는 ‘질투’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행복감 뒤에 숨어있는 불안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현실과 환상을 몽환적으로 동시에 등장시킴으로써 작품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빈 분리파 창설
1897년 클림트는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빈 분리파(Wien Secession)를 창설하게 되는데 이는 모든 사회적, 정치적, 예술적 보수로부터 벗어난다는 정신적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이 빈 분리파에는 에곤 실레, 오토 바그너, 칼 몰 등 회화, 건축, 디자인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예술가들이 함께했습니다.
클림트 작품이 논란의 중심으로
클림트는 한편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전시된 빈 대학에서 철거를 명한 작품도 있었는데 이는 <철학>이라는 작품으로 같은 해 파리 박람회에서는 금메달을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이어 <의학>과 <법학> 작품 역시 외설적이고 과도한 성도착적 표햔이 난무한다며 퇴출당했으나, 클림트는 오히려 <금붕어>라는 작품으로 그에 맞불을 놓기도 했습니다.
클림트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자신의 작품의 견해를 전하려고 했으나 지나치게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대중들은 분노했으며 결국 1905년 그는 세 점의 그림을 철수하게 됩니다.
클림트의 황금 시기
1901년 그의 황금 시기 첫 작품인 <유디트 1>이 탄생됩니다.
적장의 목을 베어 조국을 구하는 전통적인 역사적 의미의 유디트와는 완전히 다른 표현방식으로 유디트의 관능미에 집중하여 자신이 죽인 장군의 머리를 든 채 황홀한 표정을 한 몽환적인 유디트를 표현했습니다.
이후 클림트의 황금 시기의 절정을 보여준 작품 <키스>는 포옹을 하는 연인을 그렸는데 이는 클림트 자신과 그의 운명의 연인이자 플라토닉 한 사랑의 대상이었던 에밀리 플뢰게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두 사람이 등장하지만 둘의 구분은 사라지고 하나로 결합되어 있으며 수동적인 여인의 자세와 볼에 입 맞추는 남자의 모습으로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으로 에로티시즘에 빠져 선정적인 그림을 그리는 클림트의 이미지를 단숨에 벗어던졌으며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추앙되게 됩니다.
클림트의 말년
그의 말년에는 <처녀>, <죽음과 삶> 등의 걸작이 탄생되며 1918년 1월 11일 클림트는 뇌출혈을 일으킨 뒤 한 달도 채 안 되어 2월 6일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많은 작품이 미완으로 남은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클림트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 ‘뱃멀미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고 할 만큼 사생활을 드러내길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일환으로 그는 흔한 자화상 한장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데 자화상에 대해 클림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 자화상을 없다. 나는 회화의 대상으로서 나 자신에 전혀 관심이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 특히 여성에 관심이 있고, 그보다 다른 형태에 대한 관심이 더 많다. 나는 스스로를 특별히 흥미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며 인물과 풍경 그리고 가끔 초상을 그린다"
“예술가로서의 클림트를 알고 싶다면 내 작품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내라.”
-출처-
Gustav Klimt https://fr.wikipedia.org/wiki/Gustav_Klimt
<사랑> https://fr.wikipedia.org/wiki/Gustav_Klimt
<철학> <의학> <법학> <금붕어> <유디트1> https://fr.wikipedia.org/wiki/Gustav_Kli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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